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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93회) • 황해도 신천의 만세시위 (2) 103 그후 만세시위 주도자들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3 월 27일이 신천 읍내 장날로서, 이날을 거사일로 정 해졌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있어야 했다. 3월 24일 사직리 곽영선(郭永善, 학생), 무정리 곽현종(郭 賢鍾), 척서리 백영서(白永瑞, 학생) 등은 태극기를 제작했다. 무정리 이봉서(李鳳瑞)는 3월 26일 사직 리 기독교 조사 김형식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있다 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독립선언서를 만들어야 해요.” 그는 독립선언서를 빌려 갔다. 이봉서는 등사판 을 가지고 있는 김일환(金日煥)과 독립선언서 인쇄 배포를 의논했다. 두 사람은 이하영(李夏永)에게 취 지를 말하고 함께 인쇄작업을 하자고 했다. 이리하 여 이하영, 김일환 등 4명은 철필로 원지에 선언서 를 다시 써서 등사판으로 약 280매를 등사 인쇄하였 다.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신천면 무정리, 사직리, 척 서리(滌暑里), 양장리 등에 연락이 갔다. 3월 27일 오후 1시. 신천 읍내 장터에는 약 200여 명이 모였다. 김일환이 선언서를 배포했다. 곽영선 등이 태극기를 교부하고 김영호(金榮昊) 등이 군중 에게 말했다. “독립만세를 부릅시다!” “대한독립 만세!” 군중들은 하나가 되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황봉주(黃鳳周), 김석조(金錫祚), 왕경애(王敬愛), 박창항(朴昌恒), 이성식(李成植), 홍종준(洪鍾峻) 등은 군중을 이끌고 읍내 각 곳을 돌며 독립만세를 외쳤 다. 온 읍내에 자유와 독립의 함성이 물결쳤다. 일본 군대가 파견되어 신천헌병분견소 헌병들과 합동작전으로 주도자 검거에 나섰다. 그럼에도 시위 대는 쉽게 해산하지 않았다. 군중들은 해산하는 척 하며 흩어졌다가 10~30명씩 뭉쳐 다니며 읍내 곳곳 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밤 10시까지 줄기차게 시위를 이어갔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 과는 이날의 신천 읍내 시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 고했다. “3월 27일 신천의 군중이 해산 후 10명 내지 30명 의 작은 무리가 시내 각처에서 운동을 계속하고 제 지에 불응해서 수모자 기타 75명을 검거하고 해산 시켰다.” 3월 27일 밤 10시경까지 이어진 만세시위는 진정 되는가 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3월 28일에도 다시 일어났다. 이날 오전 11시 30분 기독교인을 중심으 로 한 100명의 군중이 신천 읍내에서 다시 만세운동 을 시작했다. 전날 75명이나 체포되었기 때문에 시 위대 분위기는 격앙되어 있었다. 헌병의 제지에 군 중들은 곤봉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시위대가 해산을 거부하고 헌병과 완강하게 맞서 싸우자 헌병이 다시 총격을 가했다. 총격으로 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