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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라고 되어 있다. 이 청원서는 20개 항목 에 걸쳐 한국이 독립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상세하 게 설명하고, 마지막에 “신한청년당(Société de la Nouvelle Corée) 대표, 대한인국민회(l’Association Nationale Coréenne) 대표, 대한공화국 임시정부 (Gouvernment Provisoire de la République de Corée) 대표”라고 하여 김규식(John Kiusic Soho Kimm)이 서명을 하였다. 파리평화회의 한국대표 김규식은 이 회의에 참 석한 각국 대표와 프랑스 현지인들을 중심으로 선 전 · 홍보활동을 전개하다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의 부 름을 받고 그해 8월 워싱턴으로 갔다. 김규식이 떠난 이후에도 ‘한국민대표관’에서는 이관용과 황기환, 조 소앙, 윤해, 고창일 등의 노력으로 유럽지역에서 한 국 독립운동을 선전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나, 황기환이 1921년 7월 미국으로 떠난 이후 파리위원 부는 사실상 폐지되고 말았다. 한국 독립운동가와 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의 만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기관인 ‘한국민대표관’은 김규식 대표를 중심으로 눈부신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평화회의는 제1차 대전 승전 국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약소국의 의견은 무시되었 고, 한국문제는 제출도 되지 못하고 1919년 6월 28 일 강화조약의 체결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한국대표들은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 여 한국민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에 크 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한국대표들이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각국 대표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외교활 동을 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한 한 외국인이 있었 다. 그는 베트남의 최고의 민족 지도자로 가장 존경 받는 호치민(Ho Chi Minh, 胡志明)이다. 호치민은 프랑스 제국주의의 반인륜적 지배와 착 취를 받고 있는 베트남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파리 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파리의 한국인들이 평화회의 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호치민은 1919년 6월 18일 ‘안남애국자연합’ 의 명의로, 「 안남 민족의 요구(Revendications des Peuple Annamite) 」 라는 청원서를 작성하여, 프랑스 국회 및 파리평화회의 대표단에서 보냈다. 이것이 후 일 주요 토론 쟁점이 되었고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 으켰다. 그는 ‘응아옌 아이 쿠옥(Nguyễn Ái Quốc)’ 이라는 필명으로 『르 포퓰레르』 1919년 9월 4일자에 ‘인도차이나와 한국(L'INDOCHINE ET LA CORÉE)’ 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프랑스의 식민정책을 비판하 였다. 호치민의 이 글은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 정책 의 변화를 보고,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에 대한 강고한 지배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프랑스 엑상 프로방스의 국립해외문서보관소 (ANOM, Archives nationales d'outre-mer)에 소 장된 자료에 의하면, 호치민은 파리에 있었던 김규 파리에서 한국 독립운동가와 교류했던 베트남 민족지도자 호치민 98 2023년 5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