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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91회) • 함경북도 성진의 만세시위(2) 95 아-우리 동포들아 자유의 죽음이 속박의 살음보 다 나으리라 아-우리 동포들아 기회는 두 번 오지 아니하나니 시(時)를 당하야 분연히 기(起)하야 멸망의 항(巷)에 셔 자유의 낙원으로 뛰어나가라. 아-우리 동포들아 이때에 맹기(猛起)하라 각성하라 조선 건국 4252년 3월 1일 오후 2시 조션민족대표자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이하 29인 생략) 주의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느니라 (天은 自 助者를 助하나니라) 3월 12일 주재소가 있는 하천동을 제외한 학동면 내 각 마을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3월 13일 에도 전날처럼 하천을 제외하고 각 마을에서 주민 20~30명씩 집합해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14일 오후 2시 한동(閑洞), 방동, 용호동 및 동 흥동에서 십수 명씩 하천동 북단 고지에 약 200명이 모여 태극기를 세우고 종과 큰 북을 울리면서 독립만 세를 불렀다. 일경이 출동하여 제지했으나, 불응하며 읍내로 돌아다니면서 선언서를 배포했다. 경찰대가 주모자 방동 구장 허채와 허윤봉(許允鳳), 기타 수 명 을 체포했다. 김홍종, 유명식은 피신했다가 3월 17일 에 체포되었다. 3월 13일 학상면 3월 12일에 이어 3월 13일에도 학상면 송흥동에 서 200여 명의 군중들이 집합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성천경찰서, 송흥주재소 일경들이 출동해 만세 군중 들은 해산했다. 그리어슨 목사의 회고담 3월 10일 성진읍내 만세시위 이래 한 주간 동안 성 진군 내 전 지역에서 한 지역에서 몇 번씩이나 계속하 여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일제는 경찰과 나남 19사단 병력으로 탄압과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그리어슨 목 사는 이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그다음 일요일 교회에 나가 본즉 교인은 거의 보이 지 않았다. 대부분이 투옥된 것이다. 나는 감옥에 있는 형제들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힘차게 종을 울렸 다. 종소리는 우렁차게 강 건너 유치장의 형제들에게 로 퍼져 갔다”. (강만승 편, 『그레이슨 목사 선교 수기』 114~115쪽).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제1회 성경반 학생들과 함께 한 그리어슨목사(앞줄 오른쪽 끝, 19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