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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③ 89 하였다. 저녁에 어린 아이가 종이화약 한 봉지를 사 오기에 내가 어디에 쓰는 것인지를 물어보았더니, 제 사 지낼 때 방포하여 마귀를 쫓을 것이라 한다. 끝내 그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보지 못하였으나, 친 척들이 모두 모여 밤새도록 해금을 연주하며 ‘귀신을 즐겁게 해준다’고 하였다. 살피건대, 불가에 백일재가 있다고 하니, 이 풍속은 불가(佛家)에 가깝다. 그러나 불가에는 해금을 연주하여 귀신을 즐겁게 하는 절차 가 없으니, 아마도 이는 살만교(薩滿敎=샤머니즘)일 것이다. 『금사(金史)』에 의하면 무구(巫謳)를 ‘살만(薩滿)’이 라 하거나 혹은 ‘산만(珊蠻)’이라 칭한다. 그 설명에 “마귀는 항상 사람의 몸에 붙는다. 죽은 뒤에도 혼령 이 거기에 사로잡혀 먹지도 못한다. 그러다 드디어 굶주린 귀신이 된다. 오직 기도를 잘하는 것만이 마 귀의 뜻을 잘 구스를 수가 있다. 그러면 영혼이 비로 소 풀려날 수가 있다”고 한다. 3일 눈바람이 매우 사납게 불어 수레 안의 사 람들이 모두 담요를 깔고 이불을 둘렀다. 마부는 이 마가 납작한 털모자를 쓰고 가죽 장화 속에 말린 오 라초(烏喇草)를 넣어 따뜻하게 하였다. 소하구(小河 口) 덕흥점(德興店)에 이르러 조금 쉬었다. 오후에 이씨를 작별하고 강을 거슬러 40여 리를 가서 산피참(山陂站)에 이르렀다. 객점 주인의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뜰 안에 말 1백여 필을 매어놓고 수레 수십 대를 세워놓았다. 대체로 길을 온 지 3~4일 동 안에 눈에 뜨인 것은 다만 말과 소, 양, 돼지와 개 밖 에는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비록 두어 간 초가집 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십여 마리의 가축을 기른다. 또 그 가축들을 부리는 데에 익숙하여 10세 된 어 린 아이들도 수레를 잘 다루며, 목관(牧官)의 재목이 아닌 이가 없으니, 비로소 만주 일역이 예로부터 수 렵국이었음을 알겠다. 『부여사(扶餘史)』에 이른바 ‘우 가(牛加)와 마가(馬加), 견사(犬使)와 녹사(鹿使), 저사 (猪使)라.’한 것은 모두 엽관(獵官)의 명칭인데, 단군조 선의 유속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또 세계 만국이 처음에는 모두 수렵국이다가 점점 농공과 상업을 하는 나라로 진보하였다. 지금 만주 인들은 4천여 년 동안 하나의 풍속을 이어오면서 아 직도 개혁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지혜와 식견의 비 루함을 알 만하다.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지금에 이 르러서도 계동(谿洞)이라는 나라에는 오히려 결승(結 繩)의 정치가 남아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만주인 같은 이가 그 계동인일 것이다. (결승의 정치란 문자 이전의 정치, 즉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정치를 말한다. 결승이란 복희(伏羲)가 팔 괘(八卦)를 그어 인문을 창제하기 이전의 원시적인 의사표시 방법으로 새끼를 묶어 간단한 의미를 전달 하였다고 한다.) 4일 한낮에 태평성(太平城)에 도착하니, 객점 이 즐비하고 저자가 자못 번성하다. 어떤 사람이 말하 기를, “반랍강(半拉江)의 얼음이 녹아 물 깊이가 무릎 을 넘어 건널 수가 없다”고 하였다. 마부가 그 소리를 듣고 위태롭다고 말하므로 하는 수 없이 유숙하였다. 5일 이른 아침에 출발하였다. 종일 강을 따라 서 가는데, 수레 바퀴가 물에 이따금 잠기어 험난함 을 형용하기 어려웠다. 가까이에 쉴 만한 인가가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