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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2023년 5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우리 연합부대는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김좌진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러나, 우리 연합부대의 기습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공격의 실마리를 풀지 못한 채 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청산리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백운평(白雲坪)전투였다. 이렇게 시작된 청산 리전투는 천수평(泉水坪) · 어랑촌(漁郞村) · 천보산(天 寶山)으로 이어지면서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 는데, 전사 1,200여 명, 부상 2,100여 명의 큰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이 때, 철기는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을 보좌하여 제2제대(第二梯隊) 제대장으로 활약하였는데, 특히 청산리전투 첫 날인 백운평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 렸다. 교전은 단 30분의 전투로 끝났지만, 일본군의 야마다보병연대는 거의 전멸된 상태였다. 이어지는 10월 22일 아침이 밝았다. 우리 독립군 연합부대는 철기가 이끄는 제2제대가 선두에서 일 본군이 잠복하고 있는 장소로 접근하여 퇴로를 차 단하고, 천수평 토성(土城)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아침 공기를 가르는 우리 연합부대의 총성이 일 본 군을 또 한 번 허둥대게 만들었다. 백운평전투에 이 은 두 번째의 승리였다. 다음 전투는 어랑촌이었다. 이제 우리 연합부대는 전력이 소진되어 있어서 날 이 갈수록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전투의 승 리를 위해 강한 정신력과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인 것은 홍범도 장군이 이끄 는 대한독립군이 어랑촌으로 옮겨왔다. 이 전투에 서 일본군은 우리 연합부대의 투지에 밀려 3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이 후에도 맹개골 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로 이어졌 는데, 26일까지 일본군을 상대로 10여 차례의 전투 가 계속되었다. 그 유명한 ‘청산리전투’는 화룡현 청 산리의 골짜기를 돌며 6일간 치열하게 전개되었는 데, 우리 독립군 연합부대의 승리로 끝맺음되었다. 철기는 이 뿐이 아니었다. 그는 김좌진 장군을 보 좌하여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에도 중국에 머물면서 한국광복군 창설에 온힘을 쏟았다. 이는 1945년 8월 18일 최초로 국내에 진입한 이범석 등 한국광복군 국내 정진대와 미군 OSS 대원들(중국산동성 유현[濰縣], 1945. 8. 19) 정진대원으로 여의도에 착륙한 노능서 · 김준엽 · 장준하의 훈련시 모 습 (왼쪽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