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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2023년 5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5월의 독립운동가 부터 ‘민중의 변호사’로 변신하겠 다는 장문의 ‘자기혁명의 고백’을 선언했다. 이것은 입신출세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는 비굴한 삶을 거부하고 평생 사회적 약자 와 더불어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 이었다. 그는 1921년 자유법조단 을 결성해 조선소 쟁의운동을 지 원하며 본격적인 변호활동을 전 개했다. 그가 처음 조선인 독립운동가 들을 만난 사건은 1919년 2 · 8 독 립선언으로 체포된 최팔용(崔八 鏞)·백관수(白寬洙) 등 9명에 대한 ‘출판법 위반사건’을 변호하면서 부터이다. 그는 일본이 체코의 독립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출병하면서 조선의 독립운동 을 왜 원조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하면서 한국 독립 운동의 정당성을 옹호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인 들의 독립 열정을 절감하고, 변호와 각종 지원활동 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3년 7월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해 ‘인간생활 의 개조운동과 조선민족의 사명’이란 주제의 강연 회를 가졌다. 그의 열정적인 강연에 많은 조선인들 이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귀국하자마자 기다리는 건 관동대지진이었고, 이 와중에 발생한 조선인대학살 사건이었다. 그는 자유법조단의 일 원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학살의 책임이 일본 정부 와 군부, 경찰과 자경단에 있음을 밝히려 했지만, 당국의 방해로 조사결과를 발표할 수 없었다. 후세 다쓰지는 조선인대학살에 대한 비난을 모 면하려는 일본 정부에 의해 ‘대역사범’의 누명을 쓰 고 법정투쟁을 벌이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 한 변론을 맡았다. 일본의 국체인 천황제를 송두리 째 부정하고 식민통치를 철저히 비판하는, ‘일본 재 판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의 두 주인공에 대한 변호 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법정투쟁이었다. 더구나 변 론과정에서 옥사하여 형무소 뒤뜰에 버려진 가네 코 후미코의 유해를 거두어 자신의 집에 안치했다 가 박열의 고향으로 운구해 묻히게 하였다. 1926년 3월 두 번째로 조선을 방문한 그는 전남 나주군 궁삼면의 토지사건을 조사하였다. 봉건지 주층과 동양척식회사를 상대로 전개한 나주 농민 들의 토지반환 투쟁이었다. 일본 제국의 식민지 정 책에 의해 압박받는 조선 농촌의 처참한 상황을 실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조선(천도교회관 강당) 방문 강연(동아일보, 192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