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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2023년 5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5월의 독립운동가 9월과 11월 서울을 두차례 방문하여 김한을 만난 후 늦어도 1923년 가을까지 폭탄을 건네받기로 하였다. 그러나 1923년 1월 김상옥 투탄 의거로 김한이 체포되고, 일제의 경계망이 삼엄해 지면서 계획은 일시 중단되었다. 이에 박열은 서울 흑로회(黑勞 會) 회원인 김중한을 상해에 파견해 의열단의 폭 탄을 입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중한과 박열의 불화로 이 계획도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박열은 불령사 동지인 최영환을 통해 중국 상해의 의열 단체와 폭탄구입을 협의해 무사히 인계받았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1일 돌연 도쿄 일대에 대 지진이 발생했다. 요주의 인물이던 박열은 9월 2일 경찰에 체포되었고, 가네코 후미코는 다음날은 3일 밤 계엄군에 의해 연행되었다. 세타가야(世田谷)경 찰서에는 보호 검속이란 명목으로 연행된 두 사람 이외에도 불령사 회원 전원과 120여 명의 한인이 수감되었다. 일본 경찰은 두 사람을 ‘일정한 거주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라는 명목으로 구류 29일에 처하 더니 ‘비밀결사의 금지’ 위반을 들어 불령사 16명 전원을 치안유지법으로 기소하였다. 검찰 조사 과 정에서 박열의 폭탄 구입 계획이 드러나자, 일제는 불령사 회원들에게 ‘대역사건’의 혐의를 씌워 폭발 물 취체법으로 기소하였다. 하지만 폭탄 투척계획 은 ‘혐의’만 있을 뿐 아무런 물증이 없었기에 박열· 가네코 후미코와 김중한만 기소되었고, 나머지 불 령사 회원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인대학살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려는 일본 정부에게 목숨을 구걸하 기보다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투쟁을 벌이기 로 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수많은 회유에도 불구하 고 전향을 거부한 채 예심판사에게 폭탄유입 계획 을 당당히 밝혔다. 1926년 2월 26일 도쿄 대심원 법정에서 열린 공판에서 그녀는 조선 치마저고리 를 입고 출정해 자신을 ‘박문자(朴文子)’라고 밝혔 다. 또한 박열과 함께 사형을 선고해 달라며 의연한 가네코 후미쿠와 박열(오른쪽) 공판 광경 법정에서 포옹한 박열과 가네코(동아일보,  1927.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