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page

48 2023년 5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었으나, 모친의 병환으로 서울에 가지 못했 기 때문에 3 · 1운동의 거사에 참여할 수 없었 다. 그는 이를 매우 아쉬워했고, 특히 3 · 1운동 의 주도층(민족대표 33인)에 유림(儒林) 인사 들이 참가하지 못한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 했다. 이 때문에 3 · 1운동 발발 직후 유림측에 서 독자적 독립운동을 추진하게 되었으니, 이 것이 바로 소위 '파리장서'사건 이다. 김창숙은 여러 동지들과 함께 때마침 프 랑스 파리에서 개최되고 있던 평화회의에 독 립청원서를 보 낼 것을 모의하 였다. 이에 따라 김 창숙은 1919년 3월 23일 곽종 석과 김복한(金 福漢) 등 영남 및 충청도 유 림 137인의 서 명으로 이루어 진 장서(긴 두 루마리 문서)를 휴대하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게 되었다. 나흘 뒤 현지에 도착한 그 는 이미 김규식(金奎植) 등이 민족대표로 파리 에 파견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직접 그 곳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장서를 영역 하여 우송하는 것으로 맡은 바 소임을 다하였 다. 이후 주위 독립운동 동지들의 권유로 상 하이에 머물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돼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가 수립되자 김창숙은 임시의정원의 의원(경 북대표)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중국 국 민혁명의 지도자 쑨원(孫文) 등과 회합하여 한 · 중 양민족의 협력과 공동투쟁 방안을 논 의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베이징(北京)에 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의 대의원으로 선출 되어 독립운동 진영의 단합을 위해 매진하였 다. 1925년에는 직접 국내로 들어와 독립운 동 자금을 모집하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 고, 이를 바탕으로 1926년 나석주(羅錫疇) 의 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 의거를 성 사시킬 수 있었다. 이 해에 임시의정원 부의 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주요 간부로 활 동하였다. 의열단원 나석주를 식민수탈기관 파괴에 투입, 상하이서 체포돼 국내로 압송, 참혹한 고문 당해 1927년(49세 때)에는 국내로 밀파했던 큰 중국에서 활동할 때의 김창숙(앞줄왼쪽, 오른쪽은  이회영) 서울 장충단공원에 있는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 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