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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2023년 5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자랑스런 우리 것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 면서 조선은 국제정세에 시달리 게 된다. 불안한 정국에서 서북지 역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마련하 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기울어가 는 국권을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간도 이민을 결정하였다. 그중 북 간도 명동촌은 규암 김약연이 철 저한 계획으로 건설한 이상향이 었다. 당시 회령과 종성에 살고 있었 던 네 가문은 이주를 위해 중국 인으로부터 땅을 샀고, 1899년 2 월 18일 서른두 살의 청년 김약 연과 네 가문 25세대 142명은 대 대로 살아오던 고향집을 떠나 두 만강을 건너 북간도 화룡현 지신 향 명동촌에 도착한다. 명동촌(明 東村)은 1899년 2월 18일 함경도 회령 출신 규암(圭巖) 김약연(金躍 淵, 1868~1942)의 집안 식구 31 명, 김해김씨 소암 김하규(小岩 金 河奎, ?~?)의 집안 식구 63명, 종 성의 남평문씨 성재 문병규(省薺 文秉奎, 1834~1900)의 집안 식구 40명, 규암의 스승인 도천 남종구 (道川 南宗九, ?~?)의 집안 식구 7 명 등 25세대 142명이 용정촌(龍 井村) 남쪽 40리 화룡현(和龍縣) 지신향(智新鄕) 장재촌( 長財村)에 건설한 한인 공동체 마을이다. 이들은 1899년 2월 18일 새벽 에 출발하여 저녁때가 되어서야 동가(董家)의 땅에 도착하였다. 이 곳은 중국인 지주 동한(董閑)으 로부터 600만 평에 이르는 땅을 구매하여 개간하였다고 한다. 이 듬해 두만강 강가에 있었던 윤동 주 시인의 할아버지 윤재옥(尹在 玉, 1844~1906)의 가족이 합류 하면서 다섯 가문의 이상향 공 동 체 마을이 되었다. 이곳이 윤동주 (1917-1945)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항일 민족교육의 소산 명동학교 의 기숙사(?) 명동촌 개척자들은 중국인에게 서 산 땅을 5가구가 투자한 몫에 따라 나누고, 협동으로 개간하여 옥토를 만들었으며, 가옥과 서당 을 세워 마을을 건설하였다. 다섯 가문은 각기 50리 안팎에 자리를 잡았다. 규암은 처음 용암촌에 자 리를 잡았다가 장재촌으로 옮겨 1901년 서당인 ‘규암재‘를 열었 고, 김하규는 대룡동에 소암재(素 巖齋)를, 중영촌에는 오룡재(五龍 齋)를 세워 교육에 힘썼다. 이 서 당들이 명동학교의 모태가 된다. 1920~30년대 명동촌 개념도(약도) 선바위에서 본 명동촌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