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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만주 · 연해주 독립운동,그 현장을 가다 ③ 103 동포 원호민들의 역량은 먹고 사 는 문제를 넘어서 조국의 앞날을 걱정할 정도로 커졌다. 1900년대에 조국의 운명이 망 국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 의병 지휘자 등 애국지사들에게 대두된 것이 독립전쟁론이었다. 나라 가까운 곳에서 망명 청년들, 동포 청년들을 병사로 키워 국내 진공을 단행하자는 주장이 등장 했다. 애국지사들은 북간도와 함 께 연해주를 중요한 거점으로 지 목하였고, 지신허(地新墟), 연추(煙 秋) 지역이 그 중심에 있었다. 연 해주 독립투쟁의 상징인 최재형 지사와 안중근 의사의 근거지도 여기였다. 지신허와 연추는 지난 30년 동 안 내가 여러 번 연해주에 갔을 때 마다 찾아가고 싶었던 곳이다. 그 러나 매번 다 들르지는 못했다. 중 국과의 국경 지역이라 출입을 금 하고 있어서였다. 최근에 더 강해 졌다. 지금은 우크라이나 전쟁 때 문에 중국과 러시아가 손잡고 있 지만, 국경선은 그렇지 않다. 가짜 한국 여권을 가진 중국인 첩자들 이 국경지역을 정탐하고 있기 때 문이라고 했다. 지신허는 중국식 지명 계심하 (鷄心河)의 중국어 발음을 우리 동 포들이 음차(音借)한 것이다. 드넓 은 연해주를 1860년 북경조약으 로 청국이 러시아에 할양했는데 부분적으로 청국인들이 살았던 곳도 있었고 그때 남은 지명이다. 1863년, 최운보(崔運寶) 양응범 (梁應範) 두 사람이 함경도에서 농 민 13가구를 이끌고 찾아간 곳으 로 연해주 한인 유민사의 출발지 이다. 그들은 근처의 러시아군 초 소장에게 ‘여기서 살아도 되느냐?’ 물었고 그 후 총독의 승인을 받은 것이다. 그 후 지신허는 40~50년 동안 13km 떨어진 연추와 함께 한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성 장했으며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내가 1993년 처음으로 독립기념 관 학자들에 끼여 전세기 타고 갔 을 때는 도무지 거기가 어디인가 를 알 수 없었다. 1937년 강제 이 주 후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2000년 다시 갔을 때, 바라노프 카 강, 비노그라드나야 강 주변임 이 밝혀졌다 하여 찾아갔으나 수 풀 우거진 들판이었다. 그 후에 한 국 연구자들이 연자방아 맷돌 우 물터 등을 찾았다고 했다. 2018년 늦가을에 다시 찾아가니 입구에 2004년 5월 9일 한러수교 104주 년을 하여 세운 음악인 서태지 씨 이름으로 된 안내판이 서 있었다. 마을 터로 들어가서 연자방아, 돌 절구 등 자취를 찾으려 했으나 사 유지로서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 판과 함께 밧줄이 드리워져 있었 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강력한 국내 진공 거점 연추 연추(안치헤라고도 했다)는 1900년대 초기 인구가 10만에 육 박할 정도로 상당히 커서 상연추 (上煙秋), 중연추, 하연추 3개 지역 으로 되어 있었다. 현재 두 곳은 폐허가 되고 연추에 러시아인들 이 모여 산다. 러시아식 지명은 쭈 카노프카이다. 연추를 답사하려면 먼저 하산 전투 기념비와 동상이 서 있는 해 발 300m쯤의 고지에 오르는 것 이 좋다. S자형으로 구불구불 연 결된 산길을 차를 타고 올라가면 정상에 깃발을 든 투사의 상이 세 워져 있었다. 1938년 일본군과 싸 운 하산 전투에서 승리한 크라스 킨 중위 상이다. 중위의 이름을 따 서 연추군의 지명이 크라스키노 가 되었다. 2018년 초겨울에 갔을 때는 동상과 축대를 고쳐 쌓는 작 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고지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