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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서 동쪽으로 약 200km 정도 떨어진 쉬이프 (Suippes)라는 곳에서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 라는 단체를 결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비록 노동으로 생활을 영위하지만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겠다는 희 망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인 노 동자들과 당시 프랑스로 유학을 온 학생들이 ‘재법한 국민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 하고 또 조국의 독립에 일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재법한국민회는 결성된 직후인 1920년 3월 1일 쉬이프에서 3 · 1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게 되었다. 기념식에는 유럽 각지에서 활동하던 한인들이 참석 하였을 뿐만 아니라, 파리에 있던 조소앙이 참석하였 다. 그리고 재법한국민회에 소속되었던 대부분의 한 인 노동자들과 유학생들도 기념식에 참석하여, 3 · 1 독립선언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독립운동을 위 한 결의를 다졌다. 재법한국민회의 활동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중 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역시 한국민대표관을 지원 하는 것이었다. 한국민대표관은 파리강화회의가 끝 난 이후에도 유럽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외교 선 전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민대표관이 선전 책자를 발간하고 또 각국의 정치가 · 언론인 등 을 대상으로 외교활동을 펴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을 필요로 했다. 그렇지만 당시 파리위원부를 경제적으 로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구미위 원부 뿐이었다. 이때 한국민대표관의 필요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 원한 것은 재법한국민회에 소속되었던 한인 노동자 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힘든 노동에 종사했지만 독 립운동 후원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1920년 당시 6개 월 동안 6,000프랑의 거액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 공하였다. 재법한국민회 소속의 노동자들은 독립운 동 자금으로 개인수입의 상당 부분을 독립운동 자금 으로 받쳤다. 서영해의 대유럽 외교활동 서영해는 1920년 12월 14일 프랑스 파리로 유학 을 왔다. 그는 유럽의 중심지인 프랑스의 근대 학문 을 배워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원 대한 포부를 가지고 이국 땅에 왔다. 프랑스어를 전 혀 알지 못하는 이 청년은, 20세에 6세의 유아들과 같이 프랑스 동요를 부르며 프랑스어를 차근차근 익 혔다. 11년이 걸려야만 하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까지의 프랑스 교육과정을 단지 6년만에 마쳤다. 그 리고 파리대학에 입학했지만, 한 학기밖에 다니지 못 했다. 그후엔 파리에 있는 고등사회연구학교에서 언 론학을 배웠다. 서영해는 1929년에 ‘고려통신사’라는 통신기관을 설립하여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에서 우리의 독립을 위한 외교선전 활동을 펼쳤다. 고려통신사의 주된 활동 목표는, 한국문화 소개, 일화배척(日貨排斥), 일본의 외교 선전을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파리 를 중심으로 전 유럽을 무대로 삼아, 스칸디나비아, 발 칸반도, 근동(近東)까지 돌아다니며 강연 · 신문투고 등 으로 외교 선전활동을 하였다. 활동자금이 부족하여 대규모로 선전활동을 전개하지는 못하였지만, 프랑스 언론기관과 임시정부에서 도와주는 자금으로 유럽 각 도시를 다니면서 독립 외교활동을 펼쳤다. 서영해가 파리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장 중요한 활 동은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프랑스와 유럽 100 2023년 5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