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page

86 2023년 4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묘소도 원래는 수유리 북한산 자락에 있었다. 1994년에 이장했지 만, 지금도 북한산 자락에는 지청천 장군의 묘소 터 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한국광복군 합동묘 소 터와 마찬가지로 정비하여 탐방객이 찾을 수 있 도록 관리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었다.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있는 강우규 의사의 묘소도 수유리 국가관리묘역 인근에 있었다 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강우규 의사 는 1919년 9월 2일 새로 부임해오는 조선총독 사이 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인물이다. 서대문형 무소에서 사형을 당한 강우규 의사의 유해는 원래 신사리(현 은평구 신사동) 수인묘지에 안장되었다, 1954년 강우규 의사의 고향인 덕천군민회는 서울시 의 협조를 받아 수유리 우이초등학교 맞은편(산107- 1)에 묏자리를 마련하여 강우규 의사의 유해를 이장 하고 이듬해에는 묘비도 세웠다. 이 수유리 강우규 의사의 묘소는 1966년 국립묘지로 이장되기 전까지 12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우이초등학교와 건너 편 우이감리교회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서울현충원으 로 이 장하면서 땅 속에 묻었다는 묘비는 지금도 그 자리 에 그대로 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분단극복을 위해 싸우다 역사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여운형을 생각하며 여운형은 일찍이 중국에 망명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 끝난 직후인 1918년에 신규식 등과 함께 신한청 년당 조직에 앞장섰고, 김규식을 3 · 1운동의 전야에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면서는 대중적인 독립운동의 확산을 위해 만주와 일본, 국내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동분서주한 인물이었다. 1929년 일제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던 여운형은 감옥에서 나온 후 조선 중앙일보 사장을 맡기도 하였고, 1940년대에는 건국 동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여운형은 해방정국에서 분단을 거부하고 통일민 족국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였지만, 1947년 7월 19일 분단이 기정사실화되는 흐름 속에 서 극우파 청년 한지근의 총에 혜화동로터리에서 암 살당하고 말았다. 여운형의 장례식은 인민장으로 치 한국광복군 사령관 지청천 기적비(紀蹟碑)와 과거 언론에 보도된 강우규 의사 묘소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