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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2023년 4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4월의 독립운동가 학(早稻田大學) 정치학부에 입학하 여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1918 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민족 자결주의 원칙의 대두로 독립운동 에 유리한 국제정세가 조성되자,  한국인 유학생들과 회합을 갖고 독 립운동에 나섰다. 1918년 최팔용 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1919년 2 · 8독립선언 발표에 기여 하였다.  1919년 7월, 상하이(上海)로 망 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하였다.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서 전라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1921년 5월 제8회  임시의정원 회의 때까지 적극적인 의정 활동을 펼 쳤다. 임시의정원 법제위원회 이사와 위원을 역임 하며 임시정부의 관제 및 헌법 개정에 힘썼다. 또한  국제연맹회의 안건 수정 특별위원과 정무조사특별 회원을 지냈다. 1921년 5월 12일과 19일 상하이에서 두 차례 개 최된 국민대표회의 촉진연설회에 발기인으로 활약 하였다. 김병조(金秉祚) · 이영열(李英烈) · 서병호(徐 丙浩) · 한진교(韓鎭敎)와 함께 연설회 개최를 주도하 며,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였다. 5월 19일 제 2회 연설회 직후에는 참석자 300여명의 동의를 얻 어 상하이 국민대표회기성회 조직을 촉진하기 위 한 조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8월 상하이 · 베이징(北京) · 톈진(天津)의  대표들이 협의하여 국민대표회주비회를 조직하자,  상하이 국민대표회기성회 위원 자격으로 참여하였 다. 그러던 중 1921년 11월, 김규식 · 여운형  등과  함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원동민족혁명 단체대표회(일명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로 향했다. 이 대회는 1922년 1월 21 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개최된 한국 · 중국 · 일본 · 몽골 등 각국 민족운동 단 체 대표들의 모임이다. 반제국주의 투쟁의 중심인  러시아와의 결합을 통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 을 모색하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용균은 이르쿠츠크를 거쳐 1922년 1월 7일 모 스크바에 도착하여 조선대표단에 합류하였다. 공 식 · 비공식으로 개최된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문제  해결을 위해 힘썼다. 또 조선대표단 50여명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속히 개최하자는 것을 결의하였 다. 그러나 대회 기간 중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원과  가깝게 지내고, 대회선언문에 서명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이르쿠츠크파 인사들과 갈등을 겪었다. 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1919.9.17). 가운데 붉은색 원으로 표시된 분이  나용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