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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송병조 선생 55 어려운 시기에 임시정부 지키는 파수 꾼 역할 맡아 민족혁명당의 결성과 함께 임시정부  국무위원 7명 가운데 5명이 사임하면서  임시정부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나 마찬 가지였다. 이에 차리석 등과 함께 임시 정부 재건에 노력하였다. 한국독립당 광 둥지부장 김붕준 등과 연락하는 한편 이 시영, 조완구 등을 매개로 이동녕을 통 해 김구와 제휴하여 1935년 10월 임시 의정원 회의를 열고 김구, 이동녕, 이시 영, 조완구를 새로 국무위원으로 선출했 다. 또 이동녕을 국무회의 주석으로 하 는 임시정부를 재건하고 재무장에 선임 되었다. 같은 해 11월 말에는 김구와 함께 민 족혁명당에 대응하여 임시정부의 여당 으로 한국국민당을 결성하고 이사장 김 구에 이어 이동녕 등과 함께 이사에 선 임되었다. 1937년 8월에는 난징에서 한국광복 운동자 단체연합회를 결성하여 중국 관내 민 족전선의 우파를 통일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러나 일제가 난징을 침략하면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정착하기까지 항저 우를 떠나 자싱(嘉興)에서 전장(鎭江), 창사(長 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棊 江) 등 지로 고난의 대장정을 이어갔다.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긴 뒤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외교 교섭을 통해 한 국광복군 창설에 기여했고, 9월 23일 국무 회의에서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임명되었다.  1941년 10월에는 김붕준이 임시의정원 의장 에서 탄핵되면서 다시 의장에 선출되어 활동 하다가 1942년 2월 25일 상오 10시 충칭 시 내 토교(土橋)에서 향년 67세로 신병으로 서 거했다. 이튿날 상오 11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을 추서하였다.     임시정부장으로 치러진 송병조 장례식(충칭)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에 참석한 송병조(1940년 9월, 두번째줄 왼쪽 두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