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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송병조 선생 53 년 10월 20일 안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에 임명되어 국내에서 임시정 부로 전달되는 독립운동자금을 관리하였다.  1920년 4월에는 임시공채관리국 공채모집위 원에 임명되어 평북 신의주와 고향인 용천군 을 담당하며 임시정부의 재정 확충에 힘썼다. 이어 5월에는 임시정부의 지방선전부 선 전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국내와 상하이(上海) 간 선전대원의 접촉 연계와 선전물 홍보 활 동을 담당하였다. 이륭양행을 운영하던 영국 인 쇼(George Lewis Shaw)의 도움으로 안둥 에서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는데, 1920 년 7월 경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곤란을  겪게 되었고 상하이로 피신하였다.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 상하이로 이동하여 신한청년당 당원이 되 었는데, 정확한 가입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1921년 3월에는 손정도, 이원익(李元益), 김 병조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 敎陳情會)를 조직하여 국내외 각 교회에 한국 의 실정을 알리고 독립 지원을 호소하는 진 정서를 보냈다. 같은 해 4월에는 한중 양 국민의 친선과 대 일 공동항쟁을 목적으로 하는 한중호조사(韓 中互助社)를 설립하여 윤기섭(尹琦燮), 김홍서 (金弘敍), 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활동하였 다. 또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 기독교인이  설립한 삼일당교회를 지휘하고, 대한교민단  의사원에 당선되었다. 그해 12월에 열린 대 한적십자 총회에서 회장 안창호(安昌浩)에 이 어 감사에 선임되는 등 상하이 교민의 친목 과 권익 보호에도 앞장섰다. 1921년 들어 내부 개혁의 실패와 알력으 로 영향력이 크게 약화된 임시정부의 개혁을  위해 국민대표회 소집론을 제기하며 이에 적 극 나섰다. 5월 안창호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  소집을 촉구하는 연설회를 열었고 이어 이탁 (李鐸), 차리석, 남형우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 기성회의 조직위원에 선출되어 국민대표회  소집 준비에 나섰다. 국민대표회는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월 부터 6월까지 상하이에서 열렸다. 신한청년 단 대표로 참여하여 안창호, 윤해, 신숙 등과  함께 부의장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고, 과거 문제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곧 바로 사직하였다. 한편 1924년 5월에는 흥사단에 입단 원서 송병조 흥사단 입단 청원서(193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