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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2023년 4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이 선언 발표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4 월 10일부터 이튿날까지 열린 회의에 참석한  2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를 수립하는 데 참가하였다. 이후 국무총리 를 비롯하여 각부 총장 인선까지 마친 다음  활동 본거지인 서간도로 되돌아갔다. 한족회는 부민단의 류허 · 퉁화 · 싱징현(興京 顯) 대표들이 1919년 4월 삼원보에서 결성하 였다. 김동삼은 서무사장(庶務司長)을 맡았다.  1920년 여름부터 일본군 침략이 간헐적으 로 자행될 때,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서 사 령관 지청천과 함께 300여 명의 서로군정서  독립군을 북간도로 이동시켰다. 7월 29일에 는 부대를 안투현(安圖縣) 삼인방(三仁坊)에  주둔시키는 한편, 8월에는 왕칭현(汪靑縣) 서 대파(西大坡)의 북로군정서를 방문하여 작전 을 논의하기도 했다.  1922년 6월 한인 사회와 독립군 통합을 도 모하기 위해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주도 하여 합의를 도출했으니, 그 결실이 통군부 (統軍府)였다. 이후 8월 30일 전만한족통일회 (全滿韓族統一會)가 결성되고, 이 무렵 통군부 는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는  통군부 교육부장을 거쳐 통의부 총장을 맡았 다. 청산리대첩 이후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 을 거친 다음, 만주 지역 군사 세력을 통합하 려 했던 노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국민대표회의 의장 맡아 통합운동 앞장서 1921년 이후 준비되어온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부터 5월 15일 사이 중국 상하이 에서 열렸다. 국내외 지역대표와 단체대표  400명 정도가 집결했는데, 의결권을 가진 대 표가 130명을 넘을 만큼 규모가 컸다. 1921 년 이후 침체 현상을 보이던 독립운동에 활 력을 불어넣고 임시정부 쇄신 방안을 찾던  이 회의에 서로군정서와 남만주 대표로 참석 하여 1월 18일에 의장에 선출되었다. 의장에  선출된 사실은 독립운동계에서 차지한 위상 을 확인해 주었다. 안창호와 윤해(尹海)가 부 의장이었다. 1923년 5월 말부터 국민대표회의는 크게  창조파와 개조파의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결국 6월에 들어 창조파가 가을에 새로운 정 부를 수립한다는 목표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 고 말았다. 그 뒤 만주로 돌아온 1923년 가을, 만주  지역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는 작업이 급선 무로 대두되었다. 상하이에서 돌아오자마자  통합 작업에 매달렸다. 1924년 7월 10일과  마포형무소 수감시 김동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