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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김동삼 선생 49 식인을 육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이들이  경북 지역 곳곳으로 계몽운동을 확산해 나 갔다. 서울에서 발행된 신문에서 격려 글을  게재하였고, 신민회(新民會)에서 교사를 파 견하였던 사실은 이 학교에 쏠린 기대감을  잘 보여주었다. 협동학교 경영 일선에 나서는 한편, 비밀 결사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신민회와 긴밀한 관계 를 맺고 협동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서상일 과 안희제 등을 중심으로 한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경상도 일원의 계몽운동가들과 연 대하여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이 사실은 서 울과 대구, 그리고 안동을 잇는 큰 틀에서 활 약한 사실과 계몽운동 노선 가운데서도 진 취적이고 강성을 지닌 비밀결사체에 가담하 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김동삼은 1910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1 월 사이에 김대락 · 이상룡 등 안동의 주요인 물들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출발하였 고, 뒤이어 망명객이 줄을 이었다. 안동에서  추풍령까지 걸어가고, 거기에서 기차를 이용 하여 신의주로 이동하였다. 걸어서 압록강을  건넌 뒤, 만주에서는 수레로 이동하는 멀고  험한 망명길이었다. 1911년 1월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류허현 (柳河縣) 삼원보(三源浦)에 도착하여 신흥학 교를 설립하고, 경학사(耕學社) 결성에 참가 하는 등, 초대 사장 이상룡을 도와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이는 안동 출신 인 사들과 이회영 일가를 비롯한 신민회 회원들 이 힘을 합쳐 벌인 사업이었다. 남만주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개척과 독립운동 헌신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 ‘동삼성(東三 省)’에서 따서 김동삼, 동생은 김동만(金東滿) 으로 바꾸었다. 1914년에 백서농장(白西農 庄)을 건립하고, 장주(庄主)가 되었다. 신흥학 교 1~4회 졸업생들과 분교의 노동야학 졸업 생 등 385명을 인솔하고, 퉁화현(通化縣) 팔 리초(八里哨) 깊은 산속에 들어가 둔전형 군 대를 창설한 것이다.  1919년 3월 초 지린(吉林)에서 민족대표  39명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 었는데, 이상룡과 더불어 서명에 참여하였다.  이들 39명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인물을  비롯하여 국외로 망명한 독립운동의 지도자 급 인물들이었다. 김동삼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