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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샌프란시스코 43 대한인국민회는 민족주의의 이념으 로 미주 한인사회의 안녕과 자치 그 리고 조국 독립을 최고의 목표로 삼 았다. 그 조직은 샌프란시스코에 본 부를 둔 중앙총회 산하에 북미 · 하와 이 · 멕시코 · 시베리아 · 만주 등 5개 지 역에 지방총회를 두었으며, 그 밑에  116개소의 지방회를 두었다. 1915 년경까지 해외 한인 독립운동의 중추 적인 기관으로 활동했다. 미국 본토  입국의 관문인 샌프란시스코는 해방  이전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 첫 발을  대딛는 곳으로 마음 설레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도시였다. 1938년 로 스앤젤레스로 거점을 옮길 때까지 한 국독립운동의 요람으로 오랫동안 기 억될 도시이다. 미국 본토 입국의 첫 관문 한국인의 미국 입국의 관문은 먼저 하와이를 첫 번째로 떠올리게 한 다. 대한제국이 공식 이민을 시행하기로 하면서 하와이가 한국인의 첫  번째 이민지로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와이의 이민이 한국인 의 미국 입국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하와이는 미국의 준주(準州) 로서 하와이인들에게 미국 시민의 권한을 주었지만, 미국 본토와는 엄 연히 구별된 곳이었다. 하와이가 완전히 미국의 주로 편입된 때가 알래 스카와 함께 1959년임을 생각할 때 그 전까지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을  비롯한 미국 비시민권자들은 여전히 하와이 이민당국의 허가를 받고  미국 본토로 입국해야 했다.  1945년 이전 한국인 이민자나 유학생, 그리고 방문자들이 해상(海上) 으로 미국에 입국하기 위한 첫 관문은 미국 서부의 경우 샌프란시스코 이고 동부의 경우 뉴욕이다. 이들은 샌프란시스코의 천사도에서, 뉴욕 의 엘리스섬에서 각각 사전 검열을 받고 입국했다. 두 지역 가운데 한국 인들의 주된 입국의 통로는 단연 샌프란시스코였다. 한국인들의 경우  대부분 태평양을 건너 올 수밖에 없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미국 서부로 의 입국이 동부 쪽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언제부터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미국에 들어왔는가.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다음 1883년(고종 21 년) 9월 2일 전권대신 민영익을 중심으로 한 11 명(8명: 한국인, 3명: 미국인, 중국인, 일본인)의  보빙사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보빙사는  샌프란시스코의 팰리스호텔에서 1주일간 머물 다 미국 동부로 떠났는데, 최초의 한국인들이 자 대표단이 샌프란시스코에 첫 발을 내디뎠다 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미국 이민국 통계에 따르면 1894년 김신도  등 4명, 1895년 박에스더 등 5명, 1896년 김 태준 등 9명을 비롯해 1909년까지 총 218명 의 한국인들이 매년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미국 1883년 푸트 미국공사 조선 부임의 답례로 미국에 파견된 외교사절단  보빙사 일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