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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블라디보스토크 39 권업회는 1910년대 대표적인 항일민족 언론지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권업회 교육 사업의 목적 은 민족주의 교육을 통한 조국독립의 인재를 육성하 는데 있었다. 권업회가 설립한 신한촌의 한민학교는  애국가, 대한혼(大韓魂), 국기가(國旗歌), 한반도가(韓 半島歌) 등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노래만 을 불렀으며,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민족주의 교육 의 중추기관으로 성장하였다. 항일 민족의식을 함양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권업회는 제1차 세계대전 의 발발로 강제해산되기 전인 1914년 여름까지 한 인들이 거주한 13개 지역에 지방조직을 설립하였으 며, 회원은 8,579명으로 명실공히 재러 한인들의 대 표 기관이었다.  1914년은 러일전쟁 10주년의 해였다. 블라디보스 토크에서 이동휘, 이상설, 이종호, 정재관 등은 연합 대회를 개최하고 비밀무장 항일단체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조직하였다. 제2차 러일전쟁이 발발할 것이 라 예상하고 러시아와 연합하여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일 계획을 추진하였다. 초대 정도령(正都領)은 이상 설, 책임서기는 계봉우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상설 이 사임하여 2대 정도령 이동휘를 중심으로 활동하 였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비밀리에 독립군을 편성하 고 연해주와 북간도에 3개 군구(軍區)를 설치하였다. 북간도 왕청현 라자구(羅子溝)에 장교 양성학교인  사관학교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4년 8월 1일 러시아 당국이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독립전쟁의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1914년 초 최재형 등 한인들이 준비해 온 ‘한인 러시 아 50주년 기념식’ 행사도 무산되었으며, 권업회 등  한인 단체들이 해산되었다. 이동휘를 비롯한 36명 의 한인지도자 들은 추방명령 을 받았다. 같 은 해 9월 초에 는 재정궁핍 등  여러 가지 난관 을 극복하고 발 행되던 『권업 신문』도 폐간 되었다.  러시아 사회주의혁명 한인 사회에 큰 영향 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은 한인 독립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17년 6월 시베리아 와 러시아 원동지역의 한인대표 96명은 연해주 니콜 스크-우수리스크(Nikolisk-Ussurisk)에서 전로한족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귀화 한인들, 즉 원 호인들은 러시아 내에서의 권리 확보와 자치 확대를  위하여 고려족중앙총회를 결성하였다. 우스리스크 에서는 고려족중앙총회의 기관지로 『청구신보』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신한촌민회의 기관지격으로  『한인신보』를 창간하였다. 조완구, 박은식, 윤해, 남 공선 등이 주필로 활약하였다.  이 총회는 1918년 1월 초 하바롭스크에서 비입적 (非入籍) 한인과 귀화 한인을 불문하고 한인의 민족 단체로서 전로한족중앙총회로 확대되었다. 전로한 족중앙총회의 이목을 크게 집중시킨 것은 파리강화 회의에 파견할 대표를 선발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한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파리강화회 의가 개최되자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윤해, 고창일을  이상설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주도한  이동휘. 후일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