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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블라디보스토크 37 한인 마을’ 이라는 의미로 노바야 카레이스카야 슬 라보드카(Novaya Koreyskaya Slavodka), 즉 신한 촌(新韓村)으로 불렀다. 1914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했던 이광수는 『그의 자서전』에서 신한촌을 “해 삼위 시가(市街)를 지나가서 바윗등에 굴 붙듯이 등 성이에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는” 마을로 회상하 기도 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1910년대 서간도와 더불어 망 명한 한인 민족운동가들이 활동한 중요한 국외 독립 운동 근거지였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906년이었다. 망국(亡國) 직 전 의병들이 집결하여 벌인 구국항일전은 국외 민족 독립운동의 연원이 되고 있다. 연해주 의병은 한인 사회의 중심인물로 신망이 두터웠던 최재형이 을사 늑약 이후인 1906년 이범윤과 함께 항일의 기치를  표방하면서 두드려졌다. 1908년 최재형은 이위종,  안중근, 이범윤 등과 함께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 였다. 동의회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지회(支會)를 설립 했으며, 교육에 의한 구국 정신의 함양과 실력 양성,  단체 조직에 의한 동포의 일심(一心)을 방침으로 삼 았다. 취지서는 “철환을 피치말고 붉은 피로 독립기 를 크게 쓰고 동심동력”하여 독립을 위한 무장 항쟁 을 촉구하고 있다.  1908년 여름에 동의회의 의병부대는 전제익, 우 덕순, 엄인섭, 안중근 등이 지휘하는 부대를 조직하 고 국내진공유격전을 전개했으나, 병력이 우세한  일본군에 밀려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러시아 당국 의 탄압으로 인해 동의회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1905년 이후 연해주에서 활동하였던 항일 의병세력 을 결집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벌였다는 점에서 의의 가 있다. 1908년  말 이후 연해주  의병의 지도자들 은 독자적인 항 일전의 비효율성 을 공감하고 통 합군단을 추진하 였다.  유인석, 이상설,  이범윤 등이 중심 이 되어 1910년 6 월 21일 블라디보 스토크 아무르만 의 맞은 편 암밤비(Ambambi)의 자피거우(Zapigou) 에서 연해주의 의병 계열인사 150명이 집결하여 유 인석을 도총재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 였다. 항일 의병부대들은 국내로 진공하여 국내의  의병부대들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결전을 치르고자  하였다. 홍범도, 이진룡, 우병열, 이남기 등의 의병장 들을 비롯하여 안창호, 이종호, 이갑 등이 참여하였 다. 그렇지만 1910년 8월 일제의 강압적인 ‘한일병 탄’으로 국내진공작전은 좌절되었다.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 전후 많은 단체 결성돼 1910년 8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문 『달레카 야 오크라이나(Dalekaia Okraina)』 에 한일강제병 합을 알리는 비통한 기사가 실렸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 개척리 한민학교에 한인 200여 명이 집결하 여 ‘적의 죄상을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 (聲彼之罪 明我之寃)’라는 뜻의 성명회(聲明會)를 조 십삼도의군 도총재 유인석(초상화, 한 국학중앙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