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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023년 4월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하여 궁성 앞 석교에서 폭탄을 투척했다. 비록 폭탄 이 터지지 않아 미수로 체포되었지만, 이 사건은 일 왕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일제에 충격 을 주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후 궁성 석교 정문의 바깥문 에 해당하는 사쿠라다몬(櫻田門) 근처에는 이봉창 의 사가 군중 속에 서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오전 11 시 44분, 이봉창 의사는 육군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  후 궁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쿠라다몬 경시청 앞 모 퉁이를 지나는 일왕이 탄 마차 행렬 중, 두번째에 폭 탄을 던졌다. 이 마차에는 궁내대신이 타고 있었다.  마차의 일부가 부서지고 근위기병 승마 2필이 경상 을 입었다. 일왕은 첫 번째 마차에 타고 있어서 화를  면하고 궁성문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이봉창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9월 16일과 30일에 특별재판에  회부되어 대역죄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놀랍게도 불 과 열흘만인 10월 10일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이봉창 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건 직후인 1월 9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 지인 『상해한 문(上 海韓聞)』은 「이봉 창의사의 쾌거」라 는 ‘왜황(倭皇)과 5 천만 괴뢰를 전율 하게 한 쾌거’라고  보도하고 이봉창  의사의 약력을 게 재했다. 1월 10일  한국독립당은 선 언문을 발표하여  제2, 제3의 이봉창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일제에  경종을 울렸다. 중국의 각 신문에서는 “한국은 망하 지 않았다”, 또는 “장하도다. 한인” 등으로 이봉창의  의거를 앞다투어 게재하였다.  일제강점기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청년들은 ‘의 를 보고 행하지 않음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의열 투쟁에 투신했다. 그리고 그 지향하는 목적지는 일제 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는 것, 즉 여운형의 제국호텔  연설에서 나타났듯이 “한국이 건설할 신국가는 민주 공화국”이라는 이상이었다.  이봉창 의사 사형판결을 전하는 호외(『오사카아사히신문』 1932.9.30) 필자 윤소영 일본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대학원에서 인문과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에 서 강의했으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직했다. 현재  국가보훈처 연구원으로 국가보훈 업무에 힘을 보태고 있다. 전공분야는 근대한일 관계사와 일본지역 독립운동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