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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도쿄 33 되어 1920년 7월 비공개재판에서 서상한은 폭발물  취급규칙위반으로 징역 4년, 폭탄 제조를 도와준 일 본 학생 우에무라와 이마이는 벌금 20원형에 처해졌 다. 1920년 9월 2일에는 미국의원단 일행이 조선을  거쳐 도쿄를 방문했을 때, 동우회 총무인 홍승로 등 이 한국 국기와 한국독립당청년기를 들고 의원단의  자동차에 달려들어 체포된 사건이 일어났다. 2 · 8독 립운동 후 일제 측이 파악한 일본 내 요시찰인 212 명 중 151명이 도쿄에 거주하고 있을 정도로 도쿄유 학생들의 배일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드높았다.  도쿄스테이션호텔과 양근환 의거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국적(國賊)으 로 「칠가살」(『독립신문』1920.2.5)중의 한 명으로 지 목되던 민원식이 도쿄를 방문하여 자치운동을 벌인 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민원식의 아내 엄채덕은 엄비의 오빠 엄준원의 딸 이었다. 민원식은 조선은 ‘일본의 조선’이 되어야 한 다고 부르짖으며 1920년 국민협회를 조직하고, 조 선인 참정권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국내 3천 명 이 서명한 참정권 청원서를 갖고 일본제국의회에 참 정권 청원서를 제출하겠다고 국민협회 대표자 5명 과 함께 1921년 2월 9일 도쿄에 도착했다.       황해도 연백 출신인 양근환은 천도교인으로 1916 년 일본에 건너가 노동을 하면서 일본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했다. 1921년 2월 상순부터 민원식이  도쿄에 와서 참정권운동을 할 것이라는 소식이 연일  신문에 보도되고 있었다. 양근환은 2월 10일자 『중 앙신문』에서 민원식이 도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 한 후 2월 14일에 박명련(박순천)을 통해 민원식이  도쿄스테이션호 텔 3층 70호실에  투숙한 사실을  알아냈다. 16일,  양근환은 민원식 의 바뀐 숙소 호 실을 찾아 헤매 다가 9시 30분경  3층 14호실을 찾 아가 참정권운동 의 부당함을 논 박하고 준비한 단도로 민원식을 여러 차례 찌르 고  도주했다. 민원식은 과다출혈로 병원에 호송된 직후  사망했다. 양근환은 도주 후 나가사키에서 상해로  가려다가 일경에 붙잡혀 도쿄로 호송되었다. 1921 년 6월 30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 판결을  받고 1922년 5월 4일 공소심(控訴審)에서 징역 12년 형이 확정되어 복역했다.        그는 재판정에서 민원식의 참정권운동이 조선인 의 치욕이며 조선의 독립을 저해한다고 생각하여 민 원식을 죽여 친일 조선인에게 경종을 울리려 했다고  하였다. 그는 형 양진환에게 보낸 편지에서 “견의불 위(見義不爲)는 무용(無勇)이라(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음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고 하여 자신의 기개를  드러냈다. 일왕의 궁성과 김지섭, 이봉창 의거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무고한 조선인 수천 명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울분을 느낀 김 지섭은 1924년 1월 상해에서 극적으로 도쿄에 잠입 민원식을 처단한 양근환(1894~1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