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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23년 4월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고 일찍이 상해로 망명하여 실질적 2 · 8독립운동의  배후였던 장덕수, 승려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상완을  수행원으로 대동했다. 11월 14일 상해에서 춘일환 (春日丸) 여객선으로 출발하여 모지(門司)를 경유하 여 도쿄에 도착했다. 일제 측은 사실 여운형을 회유 하여 독립운동을 철회하고 자치론으로 돌아서도록  할 작정이었다. 여운형 일행은 제국호텔에 머무르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연설 당일인 11월 27일 그를  취재하기 위해 제국호텔의 로비는 기자들로 북적거 렸다. 이 때 여운형의 연설 내용을 독립신문은 상세 히 보도했다. “우리가 건설하는 국가는 인민이 주인  되는 국가, 인민이 다스리는 국가, 인민을 위하는 국 가인 민주공화국이니 이는 대한민족의 절대요구일 뿐더러 세계대세의 요구라(「呂氏一行言動」,『독립신 문』1919.12.25)”고 여운형은 열변을 토했다.  이 자리에 있던 최근우는 “그때 다나카(田中) 육군 대신이 “당신네들 독립 만세란 개 한 마리가 짖으면  여러 마리의 개들이 따라 짖는 격이다.”라고 비아냥 대자 여운형은 “당신은 새벽에 닭이 우는 것을 모르 느냐”고 일갈하여 다나카를 실색(失色)케 했었다”고  전했다. 이 날 제국호텔에서의 여운형 연설은 일본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는 1시간 20분에 걸 쳐서 도도한 목소리로 조선 독립운동의 필연성에 대 해 설파한 것이다. 일본은 여운형을 회유하고자 했 지만 결과는 역효과였다. 하라 다카시(原敬) 총리는  이로 인해 제국의회에서 큰 비난을 당했다.  현재의 제국호텔에서는 여운형의 자취를 찾을 수 는 없지만, 메이지 일본이 자존심을 걸고 건축한 제 국호텔에서,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의 이상을 설 파하던 여운형의 모습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통 쾌한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1920년 도쿄의 유학생들 이러한 여운은 당시 최근우에게도 예외는 아니었 던 것 같다. 도쿄에서 상해로 돌아간 최근우는 1920 년 1월 9일 도쿄기독교청년회관 내 김재훈(金載勳) 에게 “가련한 자제에게 고치적(苦恥的) 재산을 남겨 주지 않기 위해서는, 자자손손 영구 완전한 경복(慶 福)을 이끌어내고자 한다면 최근(最近)의 일인(一人) 까지, 최후(最後)의 일각(一刻)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 사를 흔쾌히 발표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연하장을  우송했다. 마치 연하장의 글을 실천이라도 하려는 듯이  1920년 3 · 1운동 제1주년을 맞이하여 도쿄 유학생 들은 “어떤 압박과 어떤 제재를 받더라도 당일 만세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고 조선기독교청 년회관에서 집회를 가졌다. 오후 2시경 히비야공원  내 음악당 부근으로 이동하여 약 2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만세를 외쳤다. 이에 출동한 히비야 경찰서에 서 53명의 학생들을 체포했다. 그 중에는 이선행(李 善行), 이양전(李良傳), 이찬향(李贊鄕), 전유덕(田有 德), 현덕신(玄德信), 박승호(朴承浩), 황신덕(黃信德)  등의 여학생들도 끼어 있었다. 또한 같은 해 4월에  영친왕 이은(李垠) 결혼식에서 의열투쟁을 벌여 체포 된 서상한도 이 때 구속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메이지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 학생이던 서 상한은 영친왕과 일본 황실의 딸 나시모토노미야 마 사코의 결혼식이 1920년 4월 28일에 영친왕의 도쿄  저택인 도리이자카 어용저(御用邸)에서 열린다는 소 식을 듣고 폭탄 의거를 계획했다. 결국 사전에 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