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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베이징, 상하이  25 류하면서 아나키즘 지식을 갖추었다. 1921년 1월부 터 신채호, 김창숙 등은 『천고(天鼓)』를 발간하면서  아나키즘적인 폭력투쟁 방략을 독립운동의 수단으 로 삼았다. 신채호의 강연을 듣고 감명받은 유자명 은 아나키즘 관련 저작을 읽고 아나키스트 이론가가  되었다. 한인 유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신사상을 수용하고  민족운동에 뛰어든 것은 베이징 지역 한인 독립운동 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대표적 인물은 승려 출신 의 김성숙을 들 수 있다. 그는 1923년 10월 불교유학 생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황야』를 발행했으며, 1925 년 북경고려유학생회를 결성하여 장지락(김산) 등 사 회주의 성향의 유학생들을 이끌었다. 베이징지역의  사회주의 혁명가와 유학생들이 연합하여 ‘창일당’을  결성하고, 1925년 1월 기관지 『혁명』을 발간했다.  아나키즘 사상에 경도한 한인 학생들도 적지 않았 다. 아나키즘 이론가로 유명한 이을규와 이정규 형제 는 베이징대학에 재학하면서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등 중국인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이회 영도 아나키즘의 자유연합론에 공감하고 아나키즘 운동에 투신했다. 1924년 4월 이회영 · 이을규 · 이정 규 · 정화암 · 백정기 · 유자명 등 베이징의 한인 아나키 스트들은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정의공보』를 발행했다. 그리고 유기석 · 심용해를 비 롯한 일부 아나키즘 성향의 한인 유학생들은 중국 학 생들과 함께 ‘흑기연맹’과 ‘고려청년사’ 등 단체를 조 직하고 『동방잡지』와 『고려청년』을 간행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상하이 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1928년 3월 상하이에 ‘재중 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탈환(奪還)』을 발행했다. 그리고 이들은 1930 년 4 월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고 『남화통신(南華 通迅)』을 발간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9 · 18 사변  직후의 1931년 11월 중국인 아나키스트와 연합하 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행동단체로 ‘흑색공 포단’을 조직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요리점 육삼 정(六三亭)에서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 吉明)와 일본군사령부 간부들을 일거에 폭살할 것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육삼정 사건). 이처럼 1930 1920년 3월 경 폭탄구입차 상하이에 간 의열단원들. 오른쪽부터 김원봉 · 강세우 · 곽재기 · 김기득 · 이성우, 앉은이는 조 력자 정이소, 우하단은 이듬해 입단하는 김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