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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베이징, 상하이  23 상하이에 두는 통합임시정부가 출범 하였다. 베이징에도 3 · 1운동 이후 독립운동 가와 청년 학생들이 증가하면서 여러  단체가 만들어졌다. 1919년 3월 하순  ‘신대한동맹회’가 조직되어 임시정부 를 지원하면서 중국과의 외교적 접촉 을 시도했다. 그리고 4월경 베이징과  톈진의 청년·학생 70여 명은 ‘대한독 립청년단(또는 학생단)’을 조직하고 신 채호를 단장으로 추대했다.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다양한 활동을 펼쳤는데 특 히 외교에 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활동 노선은 무 장투쟁을 주장한 인사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게다가  1919년의 파리강화회의와 1921년 태평양회의를 상 대로 한 외교 활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임시정부 내부에서는 독립운동의 노선,  출신 지역을 둘러싼 지도자 및 각 정파 간의 갈등 및  권력투쟁이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하이 임정에 불만을 가진 박용만,  신채호, 신숙 등 무장투쟁론자들은 베이징에 집결하 였다. 이들은 각 지역에 흩어졌던 군사단체를 통일 하고자 하여 1921년 4월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였 다. 이 회의를 참가하기 위해 국내외의 단체 대표자 들이 베이징에 모였고, 베이징은 관내 지역 무장 항 일투쟁의 중심지로 급부상되었다.  그러나 베이징의 군사통일회의는 군사단체 통일  문제뿐만 아니라 이승만을 성토하고 임정 및 임시의 정원의 해산을 요구하고 나섰다. 아울러 새로운 독 립운동 지도기관을 세우기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소 집할 것을 요구했다.  국민대표회의와 민족유일당운동 상하이의 임정에서는 이승만이 상하이에 온 뒤 정 부의 내분이 더욱 악화되자, 박은식 · 김창숙 · 원세훈  등 14명은 1921년 2월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제창하 고 나섰다. 베이징을 이어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도  5월 이승만의 퇴진과 임시정부 개조를 요구했다. 결 국 1922년 5월 베이징과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이  연합하여 국민대표회의주비회의 소집을 선언하고  나섰다. 안창호도 회의 개최에 동의했다. 그러나 김 구와 이시영 등은 국민대표회의에 반대하고 임시정 부 유지를 주장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월 각지 대표 130여 명이  상하이에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독립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로 5개월 정도 계속 되었다. 그러나 대회 참석자들은 점차 창조파와 개 조파로 나뉘었다. 베이징에서 파견된 신숙, 강구우,  박건병 등은 창조파의 입장에 서서 활동하였다.  1921년 4월 북경군사통일회의 개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