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page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베이징, 상하이  21 일제하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의 공간은 산해관(山海關)을 경 계로 관내 지역과 ‘만주’로 불리 던 관외 지역으로 구분한다. 정 치·문화의 중심지 베이징(北京)과  국제화된 대도시 상하이(上海)는  1910~1920년대 중국 관내 지역  한국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한국독립운동의 기반 조성 베이징과 상하이가 한국 독립운동의 공간이 된 것은 1910년을 전후 한 시기였다. 베이징의 한국 독립운동은 신민회가 조성환(曺成煥)을 파 견하면서 비롯됐다. 베이징은 북쪽의 러시아 연해주, 중국 동북 지역과  남쪽의 상하이(上海) 등지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독립운동의 기착지 혹 은 연락처가 되었다.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고무되 었다. 신규식(申圭植)은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에서 조성환을 만나 중국 혁명의 중심지인 난징(南京)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황싱(黃興)·쑨원(孫文) 을 비롯한 중국 혁명인사들과 접촉해 한중연대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신규식은 한국 독립운동 대표 단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박은식, 신 채호, 홍명희, 문일평 등과 함께 1912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 관내 지 역 최초의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했다. 동제사 는 본부를 상하이에 두고 베이징 등 중국 지역과 연해주, 유럽과 미국,  일본 등지에 지사를 설치했다. 동제사는 상하이 한인들의 친목과 상호 부조를 표방하고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과 유기적인 관계망을 형성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상하이, 베이징의 독립운동가들은 연해주· 만주 등지의 지도급 인물 들과 연합하여 상하이 영 국 조계지에서 ‘신한혁명당’ 을 결성했다. 신한혁명당은  위안스카이(袁世凱) 정권의  지원을 얻고자 본부를 베이 징에 두었다. 신한혁명당은  고종을 당수로 추대하고 중 국과 ‘중한의방조약(中韓誼 邦條約)’을 맺어 독립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으나 성 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신 한혁명당을 통해 각지의 독 신규식(1879~1922 ) 조성환(1875~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