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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우리 것들 • 북간도 명동촌 막새기와 121 발판에도 미국, 영국 국기를 그 려놓아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일 본이 이긴다고 소리쳤다. (하략)” 라는 회고에서 당시 학교의 분위 기를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기존 사진의 명동학교 건물과는 형태 상 차이가 있다. 이 건물은 1920 년 경신참변으로 전소된 건물을 1923년에 목조와 벽돌집으로 중 건한 건물 중 하나이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자 사실적인 무궁 화보다는 이화문을 닮은 문양을 사용함으로써 민족교육의 색채 를 감추었을 것이다. 3 · 13 용정 만세 운동에는 명 동학교와 정동학교 학생과 선생 들이 조직한 충렬대(忠烈隊)가 앞장섰다. 충렬대가 조직되고, 대규모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던 배경이 북간도 의 항일 민족의식 교육에 있었 다. 항일 민족의식이 교육으로 만 가능했을까? 아니다 몸소 체 험하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몸에 배었다. 명동촌을 비롯한 북간도 한인 들은 막새기와의 항일 민족의식 을 상징하는 문양에서 보듯 일상 생활이 곧 항일 민족운동이었고, 교육이었다. 자나 깨나 항일로 독립을 하고자 하였다. 한인들은 대한인(大韓人)의 상징인 태극기 와 무궁화, 그리고 십자가로 이 은 지붕 아래서 밥을 먹고, 공부 하고, 잠을 자고, 놀면서 생활 그 자체를 항일 민족의식으로 키워 나갔다. 독립은 그러한 정신에서 우리에게 왔었다. (좀 더 자세한 정보는 필자의 「북간도 명동학교 막새기와의 꽃 문양에 나타난 민족의식」, 『한국 독립운동사연구』 48, 101~147쪽 참조, 사용된 사진은 (사)규암독립 사상연구소에서 제공) <제6유형> 5엽 꽃문양 형 1943년 명동학교 소학생 사진과 명동학교 건물 막새기와(제6유형)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 업했다(문학박사). 국립 민속박물관, 대한민국역 사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과장 등을 지냈으며, 현 재는 을지대학교 장례지 도학과 교수, (사)규암독 립사상연구소 부소장, 서울특별시 동산분과 문화 재위원이다. 논저로 『코로나 시대, 다시 집을 생 각하다』(2021,공저) ; 『대한독립! 그날을 위한 봉 오동전투』(2020) ; 『한국의 상례문화』(민속원, 2012) ; 「북간도 명동학교 막새기와의 꽃문양에 나타난 민족의식」, 『독립운동사연구』 48(2014) 등 다수가 있다. 필자 김시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