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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 대구 근대문화골목 115 시위운동이다. 이날 학생들은 선 교사 주택을 거쳐 청라언덕에서 유명한 90계단을 내려가 서문시 장으로 향하며 시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2년 완공된 계산성당은 경 상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양식의 카톨릭 성당으로 역사적 전통을 인정받아 사적 제290로 지 정되었다. 또 부근에는 ‘빼앗긴 들’ 에 봄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43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항 일민족시인 이상화 선생이 사망하 기 전에 살았던 고택, 1900년대 초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국권 회복을 도모했던 민족운동가 서상돈의 고 택이 있다. 대구 약령시는 조선시 대부터 이어져 온 3대 한약재 전문 시장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상화 형 이상정 장군 이상화 고택에서 가까운 곳 에 이상화의 형 이상정(李相定, 1896~1947) 장군의 고택도 있다. 물론 옛 자취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만, 대구시 당국에서 안내 표지판 을 설치해 알아볼 수 있다. 이상정 은 계성학교 미술교사, 용진단 위 원장을 지냈고, 1925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군 장교,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 정원 의원으로 활동하 며 독립운동을 전개하 였다. 그는 궁중비사와 야사 등 역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시서 화, 특히 전각(篆刻)에 능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구에 서 양화를 처음 들여온 인물이기도 하 다. 그의 화풍은 서동진으로, 다시 이인성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저서 로 『산은유고(汕隱遺稿)』등을 남겼 다. 한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권기 옥(權基玉)은 이상정의 부인, 즉 이 상화의 형수인데 이상정과 함께 부 부 독립운동가로 유명했다. 이상화 시인은 대구는 물론, 우 리 모두가 사랑하는 시인이다. 특 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언제 읽어도 좋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봅은 오는가, 나 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 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 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 · · ” 이상화 시인의 이 시는 두고두고 긴 여운을 남긴다. 이장희 시인과 이상화 시인은 서로 친구였다. 이장희 시인이 29 살로 자살한 뒤에 이상화 는 그의 유고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상 화가 경찰에 검거되면서 숨겨두 었던 이장희의 시와 자신의 시 상 당수가 발각되어 불태워졌다고 한다. 참으로 아깝기 짝이 없다. 최근 이상화 시의 모티브가 된 ‘빼 앗긴 들’이 대구시 남구 앞산 앞의 미군 캠프 워커 부지였다는 사실 이 밝혀졌다. 종전에는 수성구 수 성못 일대에 있었던 옛 보리밭을 보며 ‘빼앗긴 들’을 떠올렸다는 것 이 정설이었다. 다만 시내 중심가에 있는 이상 화 시인의 생가는 재개발을 눈앞 에 두고 있는 구 주택가 한 가운데 에 위치하고 있어 향후 보존과 활 용대책이 시급한 것으로 보였다. 대구 근대문화골목에서 개화기 와 일제강점기 등 근대시기 대구 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고, 아름 다운 봄날을 만끽하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선교사 챔니스주택과 구 동산의료원 현관(이전 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