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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만주 · 연해주 독립운동,그 현장을 가다 ② 109 설 · 장도빈(張道斌) 선생이 『권 업신문』을 창간했다. 1914년에 는 대한광복군정부를 결성했다. 1919년 3월 17일에는 고국에서 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다음 해 삼일절 에는 아치형의 독립문을 세웠다. 일본군은 1918년 러시아 볼셰 비키 혁명군인 적군(赤軍)과 차르 황제 편인 반란세력 백군 간의 내 전에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출병했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러시아 적군 한인 부대 연합군과 충돌하자 이를 핑계로 신한촌과 우수리스크의 한인촌을 기습하였 다. 많은 지도자가 체포되고 처형 당했다. 신한촌 독립문은 연해주 동포 들의 독립정신을 상징하는 기념 물이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없 다.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독 립문이 있던 자리’라는 간단한 표 지판이라도 세웠으면 좋겠다. 1993년 전세기를 타고 독립기 념관과 함께 간 첫 연해주 답사 때, 신한촌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 고(故) 송희현(宋喜鉉) 선생의 안 내로 독립문 자리를 밟아보았다. 송 선생은 거기서 연설한 홍범도 장군을 회상해 들려주었다. “노인네가 목소리가 쩌렁쩌렁 했지. 총바치(포수) 출신이라 유식 하진 않아서 봉오동 대첩을 설명 하는데 육두문자를 많이 썼어. 나 는 개구쟁이 친구들과 함께‘제에 미 씨부럴’하는 소리를 몇 번 하시 나 세었는데 열여섯 번이었지.” 우스운 일화이지만 소중한 역 사의 일부이다. 홍범도는 60대 후 반에 들어 은퇴군인 연금을 받으 며 1937년 중앙아시아강제이주 직전까지 니꼴라예프카의 한 콜 호스에서 수직원(守直員)으로 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신한촌에 다 시 왔던 것이다. 그런 증언을 해줄 노인마저 사 라진 것을 아쉬워하며 기억 속의 독립문 자리를 짚어보고 신한 촌 언덕을 내려갔다. 김경천이 강의한 대학건물과 일 본영사관 바다 쪽으로 100미터쯤 이동 하면 ‘A2 서울스카야’라는 표찰 이 보인다. 강제 이주 전 한인들이 살았던 거리 이름이 남은 것이다. 30년 전 처음 갔을 때는 전통적인 ➊ ➋ ➊ ‘백마를 탄 김장군의 전설’ 김경천 장군의  1932년 모습(외증손녀 김올가 씨 제공) ➋ 김경천이 누명쓰고 숙청 당하기 전에 교 수로 일했던 옛 조선사범대학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