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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2023년 4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하는 거점이 되었을 것이다. 개척 리의 옛 사진을 보면 ‘우리 동포들 이 120년 전에 이 정도로 살았구 나!’하고 놀라게 된다. 홍범도(洪範圖) 의병장도 그 무 렵에 망명길에 올라 개척리에 갔 다. 계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활 동했으나 무장투쟁밖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간부 자리를 박차고 나가 에겔세트 부두에서 하역 인 부로 일하며 군자금을 모았다.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한때 기 자로서 몸담았던 『대동공보』가 발행된 곳도 개척리였다. 1909년 10월 초, 안 의사가 두만강 국경 가까운 연추(延秋, 안치혜)에서 배 를 타고 도착한 곳도 이곳이고, 동 지 이치권(李致權)에게서 이토 히 로부미(伊藤博文)의 하얼빈행 정 보를 들은 곳도 여기였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 사가 순국하고, 그해 9월 국권피 탈 소식이 전해지자 이상설(李相 卨) · 홍범도 · 이범윤(李範允) 등 애 국지사들은 개척리에서 성명회 (聲明會)를 조직했다. 9월 11일 러 시아 극동공화국 당국이 일본의 요구에 따라 성명회와 십삼도의 군 간부 200여 명을 체포하는 사 태가 벌어졌다. 이상설과 이범윤 을 비롯한 8명의 간부는 이르쿠 츠크로 유배당했고 유인석(柳麟 錫)과 홍범도는 피신해 체포 를 면 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옛 개척리 에는 2014년에 세운 작은 기념비 가 있을 뿐 벽돌 조각 하나도 찾 을 수 없다. 기록을 보면 1911년 에 러시아 당국이 콜레라 근절을 명분으로 우리 동포들을 개척리 에서 내몰아 자기들 병영으로 삼 았다. 망명해온 의병장, 계몽운동 가 등 지도자들과 보통의 동포들 이 쫓겨가서 새로 자리를 잡은 곳 은 신한촌이다. 신한촌의 기념비 1912년 신채호(申采浩) · 이상 1999년에 세워진 신한촌 기념비. 길 건너편에 이동휘의 집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