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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90회) • 함경북도 성진의 만세시위(1) 103 의 기반을 다졌다. 목수인 아버지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도 한 국으로 와서 아들을 위하여 집 짓는 것을 도왔다. 그 리어슨은 집을 널찍하게 지어서 성경 등 기독교 전도 자료를 파는 자료실과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병원시 설을 갖추었다. 이 집은 러일전쟁 기간(1904-5)에는 러시아군 막사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 교회 옆 땅을 더 사들여 성진교회와 보신학교(普信學 校), 성진 진료소를 지었다. 1914년, 그리어슨은 선교위원회로부터 7천 달러 를 지원받아 성진에 현대식 병원을 지었다. 1917년 에는 이 성진진료소를 제동병원으로 확장했다. 이 병원에는 8명의 한국인 의사가 있었는데, 그중 4명 이 보신학교와 성진 YMCA 간부 출신이었다. 교육 사업의 결실이었다. 재동병원은 1백명 이상의 입원 환자와 1,700여 명의 외래 환자가 있는 큰 병원으로 발전했다. 그리어슨은 1906년 북간도 용정에 집회소를 세웠 으며, 이것이 1912년 해룡과 1913년 용정에 지부로 발전했고, 아치볼드 바커(Archibald H. Barker)와 도 날드 맥도날드(Donald A. McDonald) 선교사가 파 송되게 했다. 1919년 2월 중순 함흥을 중심으로 한 학생조 직이 3.1운동을 계획할 때 그리어슨은 자신의 집에서 지 역 지도자들이 치외법원 지역인 자신의 집에서 비밀 모임을 갖도록 허용했을 뿐 아니라, 적극 지원했다. 사전 준비 1919년 2월 중순 함흥 학생 단체로부터 박승봉[朴 承鳳, 일명 박응칠(朴應七)]이 성진의 유지를 찾아 왔 다. 그는 머지않아 중앙에서 놀랄만한 민족적 거사가 있으리라는 것을 전달하고, 호응을 당부했다. 3월 6일 함경남도 원산 예배당에서 성진 예수교회 앞으로 독립선언서를 우송해 왔다. 일본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계가 이 사실을 탐지하고 경계에 들어갔다. 성진 기독교계의 지도자인 강학린(姜鶴麟)·김상필 (金相弼)·강희원(康禧元)·김영배(金榮培)·이화선(李化 善)·이수용(李秀鎔)·서재영(徐在英)·이효근(李孝根)·서 유진(徐有珍)·김원배(金元培)·안성윤(安聖允)·김성우 (金聖宇)·배민수(裵敏洙) 등은 그리어슨의 제생병원에 모여 독립운동 계획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거기서는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하여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 성진 북쪽에서 본 성진읍성(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성진병원과 한국인들의 모습(19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