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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84 2023년 3월 의 아픈 역사가 남이든 북이든 독립운동의 역사와 독 립운동가에 대한 온전한 자리매김을 할 수 없게 했던 셈이다. 다행히 2015년과 2016년 영화 ‘암살’과 ‘밀정’이 연이어 성공하면서 김원봉은 사실상 복권되었고, 대 중의 뇌리에 새롭게 각인되었다. 이러한 기운을 받아 약산의 고향 밀양에서도 2015년부터 김원봉의 생가 터 주변에 ‘해천 항일운동 테마거리’를 조성하였고, 2018년의 의열기념관, 2022년의 의열체험관의 개관 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김원봉과 같은 걸출한 독립운동가가 하 필 밀양에서 탄생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 답은 2008년에 개관한 밀양독립운동기념관과 2018 년에 개관한 의열기념관을 둘러보면 쉽게 찾을 수 있 다. 밀양에는 김원봉이 독립운동의 길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부터 이미 독립운동에 뛰어든 선배들이 많 았다. 김원봉은 물론 김상윤, 최수봉 등이 다닌 동화 학교를 이끈 전홍표(1869~1929), 1910년대부터 국 권회복 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주도 한 황상규(1891~1931) · 김대지(1891~1942) · 구영필 (1890~1926), 1911년 일찍이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 교 3대 교주를 지내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윤세복 (1881~1960)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서 밀양은 1919년의 3 · 1운동에도 3월 13일의 밀양 면 장날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여덟 차례에 걸친 만세 운동을 지속했을 정도로 독립운동의 기운이 높은 지 역이었다. 의열기념관 바로 옆에는 석정 윤세주의 생가터도 있다. 윤세주는 1920년 의열단의 제1차 의거로 구속 되어 1927년에야 감옥에서 나왔다. 밀양에서 신간회 활동 등에 참여하던 윤세주는 1932년 중국으로 망명 한 이후 김원봉과 재회하여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 하였고, 이후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연안으로 가서 조 선의용군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다 일본군과의 전투 중 전사하였다. 바로 옆집에서 나고 함께 자란 2년 터울의 김원봉과 윤세주가 의열단 창립의 주역이 되 었던 셈이다. 역사기행 둘째 날 마지막 코스로 들른 김원봉의 부 인인 박차정(1910~1944)의 묘도 고민하게 만드는 장소였다. 부산 동래 출신의 박차정은 1929년 일어 밀양의 의열단 테마거리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