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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약산 김원봉과 밀양, 의열단의 자취를 따라 83 리 동작구에도 ‘심훈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 는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의열단 연구의 권위자 중 한 분인 김영범 교수(대구대 명예교수)의 특강과 박일호 밀양시장의 환대까지 받으면서 진행된 이번 역사기행에서 보고 느끼고 배운 점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역사기행 첫날 방문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생가 터에는 의열기념관과 의열기념공원, 의열체험관 등 이 들어서 있었다. 김원봉은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라는 영화 ‘암살’의 대사로 더 유명해진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밀양 사람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고, 밀양의 아이 들에게는 잠자리에서 부모가 나누는 은밀한 대화를 들으면서 ‘나도 크면 약산 선생을 찾아가야지!’라는 각오와 함께 따라 배 우 고 싶은 1순위이기도 했다. 약산 김원봉은 1918 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 래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았 고, 1920년의 제1차 의 거, 1922년의 제2차 의거(황옥 경부사건) 는 물론 1920년 박재 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와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1921년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 거, 1923년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1926년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 의 거 등 독립운동의 역사에 빛나는 크고 작은 의열투 쟁을 이끌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중국에서 활동 하고 있는 여러 정파를 통합하는 합작운동을 주도 하여 조선민족혁명당과 무장투쟁 조직인 조선의용 대를 탄생시켰고, 1940년대에는 조선의용대를 한 국광복군에 편입시키고 광복군 부사령관과 임시정 부의 군무부장을 맡는 등 독립운동의 통합에도 앞 장선 인물이었다. 하지만 1948년에 월북하면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 은 대중들에게는 잊힌 존재가 되고 말았다. 당연히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김원봉의 불운은 북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1958년 숙청되면서 남과 북에서 동시에 잊힌 존재가 되고 말았다. 분단 ❶  김원봉 흉상(이하 필자 촬영 사진)  ❷  백민 황상규를 기념하는 백민로  ❸  석정 윤세주를 기념하는 석정로 ❸ ❷ 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