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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무명지 잘라 혈서 쓴 항일의 화신 “남자현” 79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조선의 독립을 원한 다는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란 혈서와 자른 손 가락을 흰 천에 싸서 당시 하얼빈에 와 있던 국제연 맹 조사단에게 보내어 조선의 독립 의지를 호소하던 남자현 지사가 이곳 하얼빈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숨 진 것은 1933년의 일이다.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단장 리튼)이 침략 진 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 한 남자현 지사는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고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해 혈서 를 쓰면서까지 이러한 일을 감행한 것이었다. 전날 연길에서 밤 열차를 타고 12시간 만에 도착한 하얼 빈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역사적 인 현장을 볼 수 있는 곳으로 한국인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독립운동 사적지다. 하지만 이곳에서 활약한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 지사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 지 않다. 남자도 하기 어려운 의열투쟁 전개 남자현 지사는 영남의 석학인 아버지 남정한(南珽 漢)의 3남매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배웠으며 19살에 경북 영 양군 석보면 지경리의 의성 김씨 김영주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남편 김씨는 결사보국(決死報國) 정신 으로 의병에 참여하여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이듬 해 유복자를 남기고 순국했다. 그러자 남자현 지사 는 핏덩이 유복자 아들과 연로하신 시어머니를 봉양 하며 때를 기다리다 46살 되던 해에 3 · 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구국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 는 길임을 깨닫고 3월 9일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 너 중국 길림 성 통화현(通化 縣)으로 이주 해 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에 들어갔다. 이후 남자현 지사의 활동은 남 성 들 도 하 기 어려운 험 한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서는 데, 1925년에 는 채찬 · 이청 산 등과 함께 일제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암 살 · 기도하였다, 또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동삼 · 안 창호 외 47명이 중국 경찰에 잡히자 감옥까지 따라 가서 지성으로 옥바라지를 할 정도로 그의 독립 의 지는 확고했고 실천력 또한 강했다. 맨 처음 발을 들여놓은 요녕성과 길림성을 거쳐 하얼빈으로 진출한 남자현 지사는 남자들도 하기 어 려운 결심을 하게 되는데, 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무 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처단하는 일에 뜻을 모으고 거지로 변장,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몸에 숨기 고 하얼빈으로 잠입한 것이다. 이때가 1933년 초였 다. 그러나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에서 미행하 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혀 일본영사관 유 치장에 감금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 형사들에게 잡혀 유치장에 구속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일로 남자현 지 남강외인묘지가 있던 러시아정교회 건물 앞 에서 무명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