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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56 2023년 3월 곳에서 고려혁명군을 조직하고 사령관이 되 어 러시아 반(反)혁명파인 백군(白軍)을 지원 하던 일본군과 싸워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6월의 자유시참변(일명 흑하사변) 이후 한인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 고 있던 중국동북의 북만주로 돌아왔다. 이 후 중국 연변(북간도)으로 옮겨가서 1923년 5월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결성 한 고려혁명군을 기반으로 한 항일무장투쟁 역량 강화에 노력하였다. 1925년에는 다시 북만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신민부(新民府) 계 열의 김좌진 · 정신 등 독립운동 지사들과 함 께 활동하였다. 이 무렵 만주지역 독립운동 계의 중견 인물로 고려혁명당과 한국독립당 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1931년 3월 23일(양력 5월 10일) 북만주 지역 한인사회의 역량 강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연수현(延壽縣)에 세운 한인 학교 운영문제로 하동(河東)농장 지역에 갔다 가, 공산주의자의 공격을 받고 피살, 순국하 고 말았다.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맡아 교육에 힘쓰다가 피살 순국 신민부를 비롯한 3부의 군대는 국방기능 을 담당하는 조직, 곧 독립전쟁을 위해 국 내에 침투하거나 만주의 친일파 등을 처단 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조직이었 다기보다는 관할 구역 내에서 치안을 담당 하는 사실상 경찰기능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김규식의 경우 2세를 교육하여 장 기적인 항일투쟁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입 장에서 자신이 거주하던 연수현(延壽縣) 태 평촌(太平村)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양 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면서 1928년 무렵에 는 신민부의 활동구역 내에서 창당한 고려 국민당의 군사부위원을 맡았다. 1930년 7 월 경에는 위하현(葦河縣)에서 결성된 한국 독립당의 부위원장을 맡아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과 한인 동포들의 생계를 위해 헌 신하였다. 한국독립당은 민본정치의 실현, 노본경제 (勞本經濟)의 조직,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 설이라는 삼본주의(三本主義) 강령을 내세우 고 있었다. 여기서 ‘본(本)’과 ‘인(人)’은 북만 주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농민을 가리킨 다. 한국독립당은 군사보다는 자치방면에 활 동의 중심을 두었다. 한국독립당은 중앙집행 위원회가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을 끌 어 모으는 과정에서 지도부를 결성했는데, 김규식은 이때 4명의 부위원장 가운데 한 사 람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독립당 의 표면적 활동에서는 뒤로 물러나 있었으 며, 자치와 교육에 힘을 기울였던 것으로 판 단된다. 특히 그는 한인 자제들의 교육이 절실함을 깨닫고 연수현(延壽縣)에 학교를 세우고 교 육에 힘썼다. 그러던 중 1931년 3월 한족자 치연합회의 본부가 있던 주하현(珠河縣) 하 동(河東)농장에 갔다. 한국독립당 간부인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