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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국민대표회의와 만주 독립운동세력 51 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정부는 이를 묵살 하였기에 한족회에 속한 자신이 국무위원직을 수용 할 수 없었다.”고 답하였다. 또한 “소위 위임통치를  주창한 인(人)의 소위(所謂)도 가증(可憎)히 여깁니 다.”라며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 김동 삼은 새로운 정부를 만들자는 북경군사통일회의 결 정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위임통치 주장자를 임시정 부에서 물러나게 할 것을 함께 요구한 인물이었다.   인터뷰에서는 국민대표회의에 대한 김동삼의 인 식도 드러난다. 그는 “국민대표회의는 유일하고도  좋은 기회”라고 평가하며, “충분히 토의하여 바꿀 것 은 바꾸고, 합할 것은 합하여 융화적이고 원만한 효 과를 도모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한편 김 동삼은 남만주의 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왜경이 인 명을 살해하고 있고, 중국관군과 토비가 약탈을 자 행하며, 동포들 가운데도 동포에게 해를 주는 자가  있어 불안하다고 하며, 해결 방안으로 군사구와 민 정구의 구분을 제시하기도 했다. 독립전쟁 수행도  중요하지만 동포사회의 안녕도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김동삼 국민대표회의 의장이 되다. 국민대표회의가 시작되면서 김동삼은 독립운동계 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우선 회 의가 열리면서 참가 대표들의 자격을 심사하는 업무 를 맡았다.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지역과 단 체 대표자들은 모두 4백 명이 넘었다. 이들 가운데 조 사와 심의 과정을 거쳐 이 가운데 의결권을 가진 대 표로 130여 명이 선정되었다.  김동삼은 9차 회의가 열린 1923년 1월 18일 의장 으로 선출되었다. 부의장에는 윤해(尹海)와 안창호 (安昌浩)가 선임되었다. 이들과 함께 김동삼은 회의 를 이끌어갈 수장이 된 것이다. 그는 의장 역할과 더 불어 군사분과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백서농장을  시작으로 서로군정서 등 오랫동안 무장투쟁을 전개 해 온 이력에 걸맞은 활동이기도 했다. 특히 대한통 의부를 이끄는 지도자였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편 김동삼과 함께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여했던 이 진산은 특별심사위원·의정기초위원으로 활동하였으 며, 한족회 대표로 참가한 배천택은 비서장(秘書長) 에 선임되었다. 김동삼은 의장이 되면서 회의를 이끌어나갔다. 대 표들의 의견을 원만히 모으며, 독립운동의 발전적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그런데 임 시정부 존치 문제를 둘러싸고 크게 의견이 나뉘면서  어려움에 봉착했다. 임시정부를 적절하게 개편하자 는 의견과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 자는 의견이었다. 전자에 속한 사람을 개조파, 후자 에 속한 사람을 창조파라고 부른다. 김동삼과 함께  만주에서 왔던 김형식 · 이진산 등은 전자의 입장이 었다. 정식 정부수립은 뒤로 미루고, 일단 임시정부 김동삼 도착 기사 (『독립신문』 1922년 12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