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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2023년 3월 Special Theme   국민대표회의 100주년! 민족운동 세력의 통합과 혁신을 도모하다 동삼(金東三, 안동)은 상하이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 여하기도 했다. 이는 김동삼의 단독 결정이라기보다 는 만주지역 독립운동계의 방향을 가늠하는 행보였 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19년 후반 기 서간도에서도 ‘군정부’를 조직하고, 석주(石洲) 이 상룡(李相龍)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만주의 이러한  움직임에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여운형을 파견하 여 통합을 요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석주유고』 행 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이동녕(李東寧) · 이동휘(李東輝) · 안창호(安昌浩) · 이 승만(李承晩) 등 여러 사람이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세 우고, 여운형(呂運亨)을 파견하여 더불어 단합할 것 을 요청하였다. 의논이 합치되지 못하고 분분하자, 공 이 이르기를, “내 생각으로는 정부를 세운 것이 너무 빠르지만, 이미 세웠으니 한 민족에게 어찌 두 정부가 있을 수 있으리요. 또한 지금은 바야흐로 미래를 준비 해야 할 시기이니, 마땅히 단합해야 하며, 권세 있는 자리를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하고, 드디어 정부 (政府)를 상해에 양보하고, 군정부를 고쳐 군정서(軍政 署)라 하고서 독판제(督辦制)를 채용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군정부라는 명칭을 포기하는 사 안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석주 이상룡은 한 민족에게 두 정부가 있을 수  없으니 정부를 상해에 양보하고, 군정부를 군정서로  하고, 독판제를 채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 제7호에는 “11월 17일 특별국무회의 에서는 서간도 타협안이 제출되야 서간도 군사기관 (군정부), 자치기관(한족회)의 임시정부 통치하에 귀 (歸)함”이라고 공시하였다. 이는 군정부뿐만 아니 라,  자치기관 한족회까지도 임시정부에 귀속되었다는  의미이다. 그 뒤에도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계와 임 시정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도산 안 창호와 이상룡이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드러나며, 특 히 군사 부문에서는 의미있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액목현 회의는 바로 이러한 관계의  변화를 예고하는 움직임이었다.   1922년 만주에서 상하이로 향하다. 1922년 여름을 지나면서 국민대표회의를 열기 위 한 준비가 추진되자, 남만주에서도 회의에 파견할  대표를 뽑았다. 김동삼을 비롯한 이진산(李震山)·김 형식(金衡植)·배천택(裵天澤)·김철(金鐵) 등이 바로 그 들이다. 김동삼과 이진산은 서로군정서, 배천택과 김 형식은 한족회 대표로 선임되었다. 1922년 12월 김 동삼은 이들과 함께 상하이로 향했다. 『독립신문』에 는 그의 상하이 도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 가 실려있다.    서간도의 중진 인물 중의 일인(一人)으로서 통의부 의 총장으로 피선되고 또 임시정부의 노동총판으로 추천되었던 김동삼씨 (金東三氏) 상하이에 도착 후 김동삼의 행보 가운데 『독립신 문』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기자는  김동삼에게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리를 거절한 이유 를 물었다. 이에 김동삼은 “한족회가 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사람, 곧 이승만 임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