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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국민대표회의와 만주 독립운동세력 49 김동삼은 “국민대표회의는 유일하고 도 좋은 기회”라고 평가하며, “충분히  토의하여 바꿀 것은 바꾸고, 합할 것 은 합하여 융화적이고 원만한 효과를  도모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하였 다. 그는 남만주의 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왜경이 인명을 살해하고 있고,  중국 관군과 토비가 약탈을 자행하 며, 동포들 가운데도 동포에게 해를  주는 자가 있어 불안하다”고 하며, 해 결 방안으로 군사구와 민정구의 구분 을 제시하기도 했다. 독립전쟁 수행 도 중요하지만 동포사회의 안녕도 무 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무려 5개월간 진행된 회의 였다. 더불어 가장 많은 수의 독립운동계의 대표들이 독립을 위해 모인  자리였다. 비록 기대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일제강점이라 는 상황에서 독립운동계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 는 행보였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은 지속되었고, 독립운동계를 하나로  모으려는 움직임 또한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국민대표회 의가 가지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계도 분명했지만 강렬한 경험과 기억 을 남긴 것도 분명해 보인다. 100주년을 맞아 남만주지역에서 국민대 표회의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만주의 국민대표회의 소집 요구 1923년 1월 3일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남만주의 서로 군정서와 한족회에서도 대표를 파견하였다. 이는 1921년 5월 6일 액목 현(額穆縣) 회의에서 요구된 국민대표회의 소집 요구의 결실이기도 했 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출범 직후 의미있는 활동을 펼치며, 독립운동 계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침체의 길을 걸었다. 이승만 대 통령의 위임통치 청원을 둘러싸고 반 임시정부 인사들이 집결하였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구체화 되었다.  만주의 액목현 회의도 바 로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줄곧 우호적인  입장이었던 만주의 변화 된 모습이었다. 1919년 3월과 4월 사 이에 나라 안팎에서 여러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만 주에서도 그 귀추에 주목 하였다. 백서농장 장주로  활약하던 일송(一松) 김 ➊  서간도 독립운동 지도자 석주 이상룡 ➋  국민대표회의 의장을 맡은 일송 김동삼 ➋ 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