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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국민대표회의와 창조파의 논리, 향후 동향 47 지 않았다. 33명 중 17명 이상이 출석해야 하나 사면 한 국민위원이 13명에 달하여, 출석 위원은 많아야  14명에 불과하였다. 결국 1923년 12월 초에 개최하 려던 총회는 1924년 2월 중순까지 수차례 연기되었 다. 심지어 1924년 2월 18일 국민위원회는 코민테른  본부의 “국민위원회는 당지(當地)에서 회의할 필요가  없고, 산귀(散歸)함을 희망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국민위원들은, 정족수가 미달되었지만, 1924년 2 월 19일부터 23일까지 제1회 총회를 열어 임시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한국독립당 조직안과 당 규약  등을 제정했다. 군사·외교·경제·재정 등 여러 분야에  대한 사업 방침을 마련했다. 13인의 국민위원을 면 직하고 새로 10명의 국민위원을 선임하고, 후보국민 위원 10인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국무위원회를 폐지 하고, 9인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와 3인으로 구성된  비서처를 신설하였다. 북경으로 돌아온 창조파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조 직한 한국독립당을 공포하고 정비하였다. 1924년 6 월 7일 한국독립당의 국민위원회 집행위원 김규식,  신숙, 이청천, 김응섭, 윤해, 강구우, 한형권, 오창환,  김세준은 한국독립당 조직안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6월 10일 국민위원회는 포고 1호로써 “한국독립당 을 중심으로 단합하자.”고 촉구하였다. 6월 15일에 는 비서장으로 내정되었으나 국내에 들어가 조선총 독부 관리와 자치운동 참여를 논의하고 온 박용만을  파면하고, 대신 원세훈을 비서장으로 임명하기도 하 였다.  국민위원회 비서장 원세훈은 중국의 북경과 상해  등지의 독립운동 인사와 접촉하고 국내에 사람을 파 견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하였다. 원세훈은 북경대학 영문과생 이조헌과 상해 에 가서 창조파였던 서왈보, 의열단원이면서 후보국 민위원 정인교와 만나 한국독립당의 창당을 모색하 였고, 이조헌과 이상운의 차남을 국내에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한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소기 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원세훈과 신숙 등 창조파는 1924년 8월 6일  북경 동안시장에서 북경 거주 개조파 등의 한인과  북경한교동지회를 창설하였다. 한교동지회에서는  1925년 3월 1일 『앞잡이(導報)』를 발간하였는데, 원 세훈은 『앞잡이(도보)』의 이사장 및 주간으로 1926 년 초까지 자치운동론을 비판하고 절대독립론을 고 취하며, 민족유일당 결성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북경의 창조파 인물들은 1926년 10월 북 경에서 안창호 등의 개조파 인사들과 대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를 조직하였다. 원세훈·박건병 등은 세  차례의 회의에 참석하고, 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대 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의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 였다. 뿐만 아니라 원세훈은 만주에 가서 민족유일 당촉성회의 조직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필자 조규태 서강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가보훈처 연 구원,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회장 등을 지냈고, 현재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 문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천도교의 민족운동 연구』(2006), 『보천교와 보천 교인의 민족운동』(2018, 공저), 『우촌 전진한 평전』(2021)』,「1920년대 중반  재북경 창조파의 민족유일당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37, 2003) 등 다수 논 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