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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국민대표회의와 창조파의 논리, 향후 동향 43 창조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능과 외교운동 론을 비판하고, 임시정부의 조직 자체로는 부분적으 로 개조하여 철혈주의의 혁명적 독립운동을 이끌 수  없고, 효율적인 임시정부로 대폭개조하는 것은 새롭 게 만드는 것보다 어려우니, 통일된 독립운동 기관 을 창조하자고 하였다. 개조파의 임시정부 개조안  제출에 대항하여 3월 13일 창조파인 김우희(金宇希),  이충모(李忠模)가 제출한 신조직안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① 앞으로의 우리 독립운동은 전 민족의  유일한 철혈주의로써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 ② 과거  5년 동안에 조직된 각 기관 및 각 단체는 그 명칭의  높고 낮음과 시설의 넓고 좁음을 논하지 말고 일체  이를 폐지하고, 본 회의에서 우리들의 운동에 적합 한 헌법으로 통일된 깃발 아래 새롭게 조직할 것 등 이었다. 창조파인 김규식과 윤해의 보고문에 따르면, 창조 파는 “임정은 첨예한 혁명적 고조기에 수립되어 일 제에 대항하는 일부 대중을 위한 구체적 슬로건을  제시했지만 실질적인 운동의 지도에서 임시정부는  자기의 불준비성, 비현실성, 무능으로 대중의 혁명적  열의를 냉각시켰고 그로 인해 모든 영향력을 상실하 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과거의 잘못과 결함은 임정 이 전체적으로 혁명적 대중과의 원만한 관계의 유지 와 조직의 운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임정의 거 대한 행정기구의 개조만이 혁명사업의 지도를 위하 여 필요한 현실적 기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이어 “혁명세력의 연합은 조직과 단결 의 현실적인 관계에 의해 이루어져야지 중앙으로부 터 만들어지고 승인되는 연합을 반대한다.”라고 하 여, 아래로부터의 대중과 단체의 현실적인 요구를 반 영하는 통일된 독립운동 기관의 수립을 열망하였다.       창조파가 철혈주의의 독립운동을 이끌 수 있는 중 추적 독립운동기관의 창설을 주장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소외되어 이승만의 외교론적 독립운 동에 반감을 품던 왕실세력과 양반 지배세력 출신 의 인사를 견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원군의 사위 인 조정구와 그의 아들 조남승, 조정구의 사돈인 이 회영, 신채호·박은식·김창숙·이상룡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왕)와 사(士) 등 전통 지배세력과의 조 화·협력보다 민(民) 중심의 정책을 취한다고 생각하 여 상해를 떠나 북경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북경에서 군사통일촉성회나 군사통일회의에 참여하 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판하였지만 한편으로 박 용만 및 신숙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창조 파는 이들의 무장투쟁론적 독립운동론을 지지함으 로써 협력을 구하였던 것이다.     혁명적 대중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통 일된 독립운동기관의 설치라는 주장은 수만 명의 이 주 한인이 거주하고 일본과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만 주 혹은 연해주에 독립운동의 중추 기관을 설치하 고, 소비에트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전 개하자는 것이었다. 창조파의 김규식·김만겸·한명 세·원세훈 등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하고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기도 하였었다. 그런 데 북경군사통일회의에 참여하였던 박용만과 신숙,  대한국민의회의 윤해와 원세훈 등은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희망하였으나,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계 의 인사들은 통일된 민족혁명당을 조직하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