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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국민대표회의와 개조파 그리고 ‘정부쇄신운동’ 39 결국 두 개의 정부를 산출하게 된다는 것이 탈퇴 이 유였다. 이후 개조파와 창조파는 물론 임시정부 측도 참여 하며 여러 차례 비공식회의를 열고 수습방안을 논의 했지만 개조파와 창조파의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결국 6월 2일 창조파만이 참석한 회의에서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신기관 건설을 선언하면서 거의 6 개월 걸친 국민대표회의는 사실상 실패로 끝나고 말 았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 결렬 뒤 상하이에 남은 안창 호 등의 흥사단계, 윤자영 등의 상하이파 고려공산 당계 그리고 여운형 등 개조파는 다수 의석을  차지 한 임시의정원을 중심으로 ‘정국쇄신운동’을 벌였다.  한편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국 무원에 ‘내각이 협심단결하고 경비를 최소화하여 임 시정부를 현상유지하라’는 공함을 보냈다. 이어 그는  이동녕을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정부옹호파로 국무 위원을 개편하여 이승만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다시  상하이 정국은 ‘정국쇄신’을 두고 개조파와 정부옹호 파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임시의정원의 다수파인 개조파는 1924년 2월 개 원한 제12회 임시의정원에서 ‘정국쇄신’의 포문을 열 었다. 개조파는 6월 임시의정원에서 임시대통령의  유고와 국무총리의 대통령 직권대리를 핵심 내용으 로 하는 ‘임시대통령 사고 문제에 관한 제의안’을 제 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이 크게 반발했지만 9 월 10일 대통령 유고 결정을 이승만에게 통고했다.  또한 개조파는 7월 21일 임시헌법 개정 문제를 제의 했다. 이런 가운데 1924년 12월 ‘현상유지’를 위해 재정  마련에 급급했던 이동녕 내각이 친일파로 알려진 민 영익의 서자 민정식을 통해 재정을 해결하려다가 민 정식을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에게 탈취당하는  돌발사건이 일어났다. 이동녕 내각은 이 불미스런 사 건에 책임을 지고 총사직했다. 이에 따라 12월 17일  박은식을 국무총리로 하는 개조파 내각이 들어서면 서 ‘정국쇄신운동’도 빠르게 추진되었다. 해가 바뀌어 1925년 제13회 임시의정원이 개원되 자 개조파는 3월 23일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한 다는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개조파는 임시헌법  개정에 착수하여 3월 30일 임시헌법개정안을 통과 국민대표회의 개회 사실과 참여 단체 및 대표자를 보도한 국내 기사(『동 아일보』, 192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