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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국민대표회의 100주년! 민족운동 세력의 통합과 혁신을 도모하다  34 2023년 3월 필자 반병률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미국 하 와이대학교 역사학 박사. 한국근현대사를 전 공분야로 하고 있으며, 세부 전공분야는 한국 독립운동사, 한인이주사, 해외동포사, 한-러  관계사이다. 주요 저서로는 『성재 이동휘 일 대기』,  『통합임시정부와 안창호, 이동휘, 이 승만: 삼각정부의 세 지도자』, 『남한에 남은  사회주의혁명가 김철수』,『러시아 고려인사회 의 존경받는 지도자, 최재형』, 『항일혁명가 최 호림과 러시아지역 독립운동의 역사』, 『The  Rise of the Korean Socialist Movement:  Nationalist Activities in Russia and China,  1905-1921』, 『홍범도 장군: 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외 다수가 있다. 고문이 접수되었다. 개조파 는 제2차 통고문에서 “소수  대표의 편파적 회의는 국민 대회의로 인정하지  않노 라”고 선언하였다. 마침내  이날 회의에서 총 47명의  대표들이 출석한 가운데 국 호를 ‘한’으로, 연호는 ‘기원’ 을 쓰기로 가결하였다. 6월 6일 임시정부 내무총 장 김구 명의로 “국민대표 회가 6월 2일 연호 및 국호 를 따로 정하는 것은 민국에 대한 모반”이라고 하면서 “6월 2일 이후의  일체 불법행위의 철폐를 명하고 대표회 자체의 즉각 해산을 명한다”고  했다.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노백린을 비롯한 각 총장 명의의 국무원 포 고문을 발표하였다. 포고문은 “소수가 불법 개회를 하여 국호나 연호를  제멋대로 변경”하여 “국내에 나라를 세운 정부 위에 정부를 중첩하는  반역을 범한 것”이라고 창조파의 신기관 건설을 공격하였다. 결국 국민대표회의 잔류파(‘창조파’) 39명이 참석한 가운데 6월 7일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날 국민위원 33명, 국무위원 5명 가운데 4명(내 무 신숙, 외무 김규식, 군무 이청천, 재무 윤덕보), 그리고 고문 31명을  선출하고 폐회하였다. 개조파 57인은 성명서를 내고 창조파의 결정이  부당함을 성명하고 아울러 그들이 퇴출한 사실의 전말을 밝혔다. 국민대표회의는 상해에서 1923년 1월부터 6월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 국내외 각 지역과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된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유일무이한 회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종국적 으로 파열로 귀결되었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독립운동과정에서는 물 론 민족사적 입장에서도 끊임없이 새롭게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국민대표회의 해산 명령을 내린 내무총장 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