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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국민대표회의 100주년! 민족운동 세력의 통합과 혁신을 도모하다  30 2023년 3월 거 귀환하게 되면서 국민대표회 개최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한편, 4월 16일 임시의정원에서는  국민대표회의 조속한 개최를 찬성하자는 천세헌 등  102명이 제출한 인민청원안이 통과되어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국민대표회 주비위원회의 결성 한형권의 자금 덕분으로 활동을 재개한 국민대표 회주비회는 12명을 위원으로 한 국민대표회주비위 원회를 구성하였고, 1922년 5월 10일 자로 「국민대 표회주비위원회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선언(서)」 는 “시세의 추향과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과거의 모 든 분규와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 확 실한 방침을 수립하여 우리의 독립운동이 다시 통일 적, 조직적으로 진행되게 할 양대 안건 하에서 국민 대표회 소집사항을 주비할 책임을 부담하고 성립되 었다”며 그 활동 목표를 제시하였다. 주비위원회는 1921년 8월에 결정한 대표선정에  관한 사항을 수정한 내용을 『독립신문』 (1922년 6 월 3일 자)에 발표하였다. 대회는 당초 1922년 9월  1 일에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10월 15일로 그리고 다 시 12월 20일로 연기하였는데 교통의 불편 때문이 었다. 대회가 개최되지 못한 또 다른 원인은 1922년  10월 말 러시아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 공산당 연합대회였다. 이 대회에는 128명의 대표가  참여하였는데, 특히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경우 국내  대표들은 국민대표회의 참석 대표권을 갖고 있어서  이들의 상해 도착을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2월 하순에 이르러 60명에 가까운 대표들이 도 착하여 12월 23일부터 28일까지 수차례의 예비회의 를 가졌다. 특히 12월 27일 삼일당에서 개최한 예비 회의에서는 대표들이 중론을 모아 1월 3일에 정식회 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임시회의 개최와 대표회의 집행 간부진의 구성 1923년 1월 3일 개회된 국민대표회의는 6월 7일 까지 총 74차례의 회의를 가졌는데, 임시회의에 이 어 정식회의를 가졌다. 임시회의는 1월 3일부터 1월  29일까지 15차례의 회의를 통하여 임원 선출, 대표 의 자격 심사규정과 회의규정, 대표 자격심사 등을  마쳤다. 정식회의는 1월 31일 정식의 개막식이 개최 된 이래 6월 7일까지 진행되었다. 의결권을 가진 정 식 대표의 총수는 모두 125명으로, 이들은 83개 단 체, 11개 지방(국내 8도와 국외 3개 지역-중령, 노령,  미주)을 대표하였다. 방청인 100여 명을 포함해서 2 백여 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1923년 1월 3일, 대표 62명이 참가한 가운데 주비 위원장 남형우가 대회성립을 선포하였다. 임시의장 으로 안창호가 선출되었고, 안창호는 유선장과 배천 상해에서 이동휘(앞줄 가운데)와 고려공산당 핵심 간부들. 앞줄 왼쪽부터  현정건, 이동휘, 박진순, 김립. 뒷줄 왼족부터 김철수, 계봉우, 이증림(사 진-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