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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국민대표회의의 개최 배경과 전개 과정 29 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대미위임 통치 청원자(이승만)를 성토하기로 결 의하고, 상해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을 부인하고 1919년 4월 23일 국내 국 민대회에서 조직·발표된 ‘대조선공화국 임시정부의 계통’을 계승하여 새롭게 정 부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창조론] 4월 하순에 이르러 임시정부의 주요  각원들인 유동열(참모총장겸 총사령 관), 남형우(교통총장), 김규식(학무총 장)이 사임하고, 5월 11일 통합임시정 부 출범의 제1등 공신인 안창호(노동국총판)가 사퇴 하면서 임시정부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지고 말았 다. 또한 5월 6일 무장독립군의 유력한 근거지의 하 나인 서간도 액목현(額穆縣)에서는 서로군정서, 한족 회의 주요 간부들인 여준, 이탁, 김동삼, 곽문, 이진산  등이 임시정부 개조의 필요성과 위임통치청원자(이 승만)의 퇴거를 요구하였다.[개조론] 국민대표회 기성회, 촉성회, 주비회의 출범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하게 된  계기는 상해에서 개최된 두 차례의 연설회였다. 5월  12일 상해 재류 동포 4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상 현당(尙賢堂)에서 개최된 첫 연설회에서 여운형과 안 창호가 연사로 나서서 국민대표회 소집의 필요성을  제창하였다. 5월 19일 모이당(慕爾堂)에서 개최된 두  번째 연설회에서는 안창호가 연사로 나섰고 국민대 표회기성회 조직위원 20명을 선출하였다. 마침내 6 월 6일 상해 국민대표회 기성회가 조직되었고, 이어  북경, 천진, 하와이, 남경, 미주 다뉴바 등지에서 국민 대표회 촉성회 또는 국민대표회 기성회가 차례로  조 직되었다.  1921년 8월, 상해, 북경, 천진, 남경의 대표들이 국 민대표주비회를 조직하였다. 주비회는  회의 지점,  회의기일, 대표 자격 등 진행방침을 결정하였는데,  대표회를 상해에서 11월 상순에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주비회는 일정대로 활동을 추 진할 수 없었다. 대회 개최예정일인 11월에 워싱톤 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고, 이에 대항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극동민족대 회’)가 준비되고 있었다. 민국(民國) · 기원(紀元) 연호  논쟁과 국민대표회 소집에 필요한 자금 문제 역시  대회 개최를 어렵게 한 요인이었다. 결국 임정 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던 한형권 이 소비에트정부로부터 20만 루블의 자금을 소지하 고 1921년 11월 21일 상해에 도착하게 되면서 국 민대표회주비회 활동이 재개되었다. 그리고 워싱톤 회의와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가 종결되고, 특히  1922년 3월 모스크바 대회 참여 대표들이 상해로 대 1920년 7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 참가한 박진순(빨간 원으로 표시 된 인물). 그 왼쪽은 블라디미르 레닌(나무위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