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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국민대표회의 100주년! 민족운동 세력의 통합과 혁신을 도모하다  28 2023년 3월 시대통령 이승만은 승인 · 개조 문제에 연관된 정부  수반 칭호, 구미위원부의 권한과 위상, 미주지역에서 의 애국금 · 공채 등 문제를 둘러싸고 현격한 인식 차 이를 드러내며 충돌하였다. 국무총리와 총장들 사이 에서도 여운형의 도일(渡日)문제, 소비에트러시아 특 사 파견 문제, 이승만 불신임운동 등 현안 문제로 내 홍이 발생하였다. 1919년 말 ‘대정방침’을 수립하며  기세있개 출범한 ‘통합임시정부’는 ‘중앙기관’으로서 의 위상이 크게 저하되고 있었다. 1920년 가을 서북간도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일 본이 천인공노할 만행인 경신참변(간도참변)을 자행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방비 상태의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무런 대책이나 대응도 취하지 않았 다는 점에서 상해 임정은 국내외의 격렬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처하게 된 임시대통령 이승 만이 1920년 말 미국으로부터 급거 상해로 왔다. 그 리하여 1921년 1월 5일 이후 대통령이 최초로 참석 한 국무원 회의가 세 차례 열렸 고, 국무총리 이동휘가 이승만 의 대미 위임통치청원에 대한  해명과 근본적인 임정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이  이승만의 거부와 안창호와 이 동녕 등 기호 출신 총장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이동 휘는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다. 1 년여 유지돼온 통합임시정부가 사실상 붕괴되고 만  것이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요구와 확산 국무총리 이동휘의 사임으로 시작된 시국 변화에  호응하여 1921년 2월 국민대표회 소집이 처음으로  제창·발기되었다. 박은식, 원세훈, 최동오, 안병찬, 유 례균, 왕삼덕, 김창숙 등 15명이 「우리 동포에게 고 함」을 반포하여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제창하였다.  이들은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전국민의 의사에  의하여 통일적인 온고(穩固)한 정국을 기도하고” “군 책(群策)과 군력(群力)을 복합하여 독립운동의 최량 (最良)한 방침을 수립”할 것을 천명하였다.  북경(北京)에서는 1920년 9월 박용만, 신채호, 신 숙, 박건병 등 임정 비참여인사들의 주도로 조직된  군사통일촉성회가 군사통일회의(1921.4.17~6.22) 1920년 3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3·1절 1 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대한 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간부들. 앞줄  가운데가 이승만 당시 임정 집정관총재, 오 른쪽은 김규식 당시 구미외교위원장(국가보 훈처 제공).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은 후일  큰 문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