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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국민대표회의의 개최 배경과 전개 과정 27 국민대표회의는 상해(上海)에서  1923년 1월부터 6월에 이르는 장 기간에 걸쳐 국내외 각 지역과 독 립운동단체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 데 개최된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 의 유일무이한 회의였다. 국민대 표회의가 종국적으로 파열로 귀결 되었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독립 운동과정에서는 물론 민족운동사 적 입장에서도 끊임없이 새롭게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국민대표회의의 소집 배경-통합임시정부의 위상 하락 3 · 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선포된 임시정부들 가운데 노령(露領) 연해 주의 대한국민의회(1919.3.17)와 중국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 (1919.4.11) 두 정부만이 인적 · 물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1919년 8월 말 이 두 정부는 1919년 8월 국내에서 선포되어 ‘대표성’과 ‘정통성’에서  우위에 있던 한성정부(1919.4.23)를 봉대 · 승인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 하여 임시의정원과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고, 정 부는 한성정부 각원 명단대로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상해임정측은 임 시의정원(8월 23일~9월 17일)에서 앞서 4월 11일 임정 조직 당시 제 정한 임시헌장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임시헌법을 새로이 제정하였고 한 성정부의 ‘집정관총재’를 ‘대통령’으로 정부수반의 칭호를 변경하였다.  국민의회측은 상해임정측이 ‘승인’이 아닌 ‘개조’를 단행하여 통합을 위 한 ‘협약’을 파기하였다며 통합임시정부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승 인 · 개조분쟁의 결과 한국독립운동세력은 임시정부 참여파(개조파)와  비참여파(승인파)의 두 진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두 진영은 3년여 후 에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계통파)와 창조파(건설파)로 재결 집하여 ‘중앙기관’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통합임시정부는 일부 불참 세력이 있었음에도 국내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출범하였다.그러나 출범 얼마 후 상해의 국무원과 미주의 임 1921년 1월 1일 신년축하회 직후 상해  시내에서 기념촬영한 임시정부 요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