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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우리 것들 • 쌀의 문화혁명 117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버 리고 다른 곳으로 찾아가는 형태 였다. 마치 강원도의 화전을 경작 하는 모습과 같았다. 한인이 논농사가 가능한 곳으 로 이주하는 곳을 따라 독립운동 기지도 따라다녔다. 서로군정서 (군정부)가 처음 터전을 잡았던 유하현 삼원포가 아닌 길림성 화 전현에 본부를 두었던 것도 이곳 이 석주 선생이 논을 찾아 이주한 곳이기 때문이다. 신흥학교가 합 니하로 옮긴 것이나, 정의부 참의 부 통의부 등이 각기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던 이유 역시 논농사 가 가능한 곳으로 옮길 때 독립운 동기지 역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중국 동북지역의 식생활 문화를 바꾼 문화혁명가 한인 발해 시대에 중국 동북지역 에 벼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 지만, 완전히 단절되어 이 지역 은 밭농사 중심이었다. 옥수수 와 조, 수수가 전부였다. 동북 지 역은 같은 위도의 다른 지역보 다 온도가 2~6도 높고, 강우량 도 50~600mm로 양질의 쌀 생 산이 가능했다. 석주 이상룡 선 생은 “만주인은 한전(旱田·밭) 작 물만 생산하고 관개(灌漑)의 이 익을 모른다. 우리가 한전 곡물 만 먹어야 하니 풍토가 너무 달 라 병에 걸리기 쉬워 황지(荒地) 를 수매하여 벼농사한다”라고 하 였다. 한인은 쌀을 먹어야 한다 는 것이다. 흰옷으로 하얗게 만주 허허벌판 을 뒤덮었던 한인들은 다음과 같 은 노래를 불렀다. “만주 땅 넓은 들에 벼가 자라네  벼가 자라  우리가 가는 곳에 벼가 있고  벼가 자라는 곳에 우리가 있네 우리가 가진 것 그 무엇이냐  호미와 바가지밖에 더 있나 호미로 파고 바가지에 담아 만주벌 거친 땅에 벼씨 뿌리여 우리네 살림을 이룩해 보세.” 노랫말처럼 논농사는 이곳에서 한인의 특허 기술이었다. 어려움 도 많았다. 한인은 황무지였던 습 지의 갈대밭을 갈아엎어 논을 만 들고 수로를 개설해 하천의 물을 끌어들였다. 습지를 가득 덮은 ‘울 로초[烏口側草]’는 ‘울로 덩이’라고 했듯이 뿌리가 엉켜 큰 쟁반처럼 깔려 있어 이를 걷어내는 일이 가 장 큰 일이었다. ❼ 중국 흑룡강성 오상입쌀 들판(흑룡강일보) ❽ 영구농장 한인의 각설이 공연 기념의 마을 주민들(요녕성 반금시 대와현 중앙준분장 영흥농장, 2005년, 강위원 제공) ❽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