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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자랑스런 우리 것들 116 2023년 3월 괴마자 하전자에서 한인 농민들 이 벼농사 시험에 성공하여 벼 재 배 기술을 전 동북 지방으로 보급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북간도 용정에는 1907년 대교동에서 벼 농사를 성공하였다고 한다. 논 찾아 삼천리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간과하 는 것 중의 하나가 해외 항일 독 립운동기지라고 하면 한 곳에 몇 십 년 정착한 것으로 여기는 것 이다. 허은(許銀, 1907~1997) 여 사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 람 소리가》(1995), 이해동(李海東, 1905~2003) 여사의 《만주 생활 77년, 난중록》(1990), 이은숙(李恩 淑, 1889~1981) 여사의 《서간도 시종기》(1966) 어디를 보아도 한 곳에 지긋이 정착하지 못했다. 가 깝게는 몇십 리, 멀게는 몇천 리를 이사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한 예를 들면 허은 여사는 1915 년 통화현 다황거우에 처음 정착 하여 화전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농사가 시원찮아 진두허로 옮긴 다. 이곳 역시 농사가 잘되지 않아 다시 만리거우 우두거우로 옮긴 다. 다시 농사가 더 잘 되는 곳인 유하현 고산자, 삼원포, 하동 다두 자, 영안현 철령허, 화전현, 반석 현 하마허자, 후얼란, 서란현 소성 자, 소고성자 등 짧게는 몇 달 길 게는 몇 년 간격으로 이사를 했다 고 회고하였다. 이사를 해야 할 이유야 다양했 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농사 지을 땅을 찾는 것이었다. 이상 룡 선생이 대사탄(大沙灘)이라 는 곳에 광업사(廣業社)를 설치하고, 중국인에게 쓸모없는 황량한 저 습지를 빌려서 조선인들이 논을 풀어 벼농사를 짓도록 했다. 처 음에는 실패하였으나 1914년부 터 크게 성공하여 산에서 화전을 일구어 사는 한인들이 평지로 내 려와 개간하여 벼농사를 짓도록 했다. 한인이 농사지을 땅을 찾는 것 은 바로 논농사가 가능한 곳을 찾 는 것이었다. 1910~20년대 당시 에는 이미 만주 여러 지역에 한인 이 흩어져 살고 있었고, 친인척이 여러 곳에 있었기에 여러 네트워 크를 이용하여 논농사가 가능한 곳을 찾았다. 처음에는 습지를 개 간하여 3년간 농사를 지으면 풀 ❺ 최초로 벼농사를 시작한 마을이라는 비석(와니전자촌, 2005년 강위원 제공). 요녕성 본계시 환인만족자치현 괴마자진 ❻ 북간도 최초의 벼농사 성공지 대교동(1906년, 간도사진첩, 규암독립사상연구소 제공) ❻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