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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2 · 8 독립선언과 송계백 99 구한다. 그들의 요청이 받 아들여지지 않자 유학생 전원이 자퇴를 결의하여 동맹퇴학원을 제출하는 과감성을 보인다. 결국 대 한유학생회(친목, 권익단 체)의 지원으로 그들의 요 청이 받아들여졌다. 이런 모의국회 사건에 대한 경 험으로 유학생들의 자긍 심과 용기가 충천해 있던 때였다. 조선 독립에 대한 요청이 일본정부에게도 받아들여 질 것을 기대하며 그들은 뜻을 모 으기 시작했다. 선봉에 나선 이가 최팔용(와세다대학 유학생)이었 다. 그는 조선유학생학우회 간행 물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 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 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동지들 을 모으기 시작했다. 물론, 1912 년 10월에 조직된 동경유학생학 우회를 통해 강연회, 토론회, 웅변 대회, 체육대회에서 유학생들 간 의 친목을 다지던 그들이었다. 이 런 활동과 모임에서 그들은 동경 에서 하나로 뭉쳤고, 민족의식과 애국사상을 고취해 온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고립무원(孤立 無援)의 동경 땅, 남의 나라에서 감시 속에서 일경(日警)의 눈치를 보며 공부를 하는 게 쉬운 일이었 겠는가? 그들은 유학생들끼리 서 로 의지했고 보이지 않는 끈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은 똑똑했다. 영국인이 일본 고베에서 발행 하는 The Japan Adventiser에 실 렸던 한 보도기사도 그들을 자극 했다. 한국 독립에 관한 보도였으 니, 이를 놓칠 그들이 아니었다. 재미 한인들이 독립운동을 지원 해 달라는 청원서(1918년 12월 12일)를 미국정부에 냈다는 보도 도 용기를 주었다. 여기다 위에서 언급한 무오독립선언(대한독립 선언)은 그들에게 지대한 영 향력 을 끼쳤으리라. 중국 길림성과 일 본 동경과의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영향력이 라고 하는 것은 시공(時空)을 초월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김교 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윤동 주의 외삼촌), 김좌진, 이승만, 이 시영, 박은식, 안창호, 신채호 등 이 서명을 하여 무오독립선언이 이뤄진 것을 모를 리 없는 동경 유 학생들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정 세가 그들을 움직이게 했고, 그들 은 활시위를 당겼다. 무오독립선 언은 육탄전을 불사하고라도 독 립을 완수하자고 하는 강경한 주 창이었다. 그 강경함은 2 · 8독립선 언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학생들 도쿄 2 ٠ 8독립선언 기념관 전시물  사진출처 :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