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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외로움과 역사에 남긴 족적과 그의 죽음을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그의 혼 백이 얼마나 슬플까? 동경을 찾는 여행객들조차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그 는 참 외로울 것 같다. 만일 그가 1919년 2월 8일에 피체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다른 유학생들(360여명)처럼 단체로 동맹 휴학을 하고 귀국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3·1 운동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학생 독립 운동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글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2 · 8 독립선언과 송계백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98 2023년 2월 뜻을 같이 하는 이의 억울한 죽 음은 동지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 는 법이다. 2 · 8독립선언에 집행 위원으로 선두에서 참여했다가 억울하게 옥사한 송계백 학생에 대한 소문은 현해탄을 건너 조선 에도 전해졌다. 학생들의 가슴이 들끓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은 용감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해나 간다.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의 학 생들이었다. 나이가 많아야 대학 교 1, 2학년 정도였다. 어린 학생 들이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 할 줄 알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줄 아는 게 그 당시 학생들이었다. 다시, 동경 유학생들의 이야기 로 돌아가 보자. 그들의 용감성에 대해 한 가지 더 짚어볼 것이 있 다. 1907년 3월, 와세다 대학에서 열린 모의국회 사건이다. 전연풍 길(田淵豊吉)이라는 일본 학생의 의제 제안에 우리 조선의 유학생 들은 분개한다. ‘한국 황제를 일본 의 화족(華族)으로 대우하는 것’- 한국 황실과 민족을 모욕하는-의 제를 그대로 지나치지 않은게 동 경유학생들이었다. 학교 당국에 전연풍길의 퇴학처분을 요구한 다. 학장이 사과할 것도 강력히 요 2 · 8 독립선언서